블랙업 커피, 블랙샷(Black Shot)

 

블랙업 커피의 또 다른 에고(Ego)블렌드 블랙샷입니다. 이전 에고 블렌드였던 셀리나(Selina)가 중-약배전이었다면 블랙샷은 이름답게 중배전 이상의 로스팅 단계를 지향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투를 개봉하자마자 향기와 원두에서 배어나오는 기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략적인 원두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이처럼 무리한 약배전을 통해 디팩트를 드러내는 최근의 경향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중배전을 택한 블랙샷 블랜드가 어떤 매력을 보여줄지 궁금해집니다. 

 

기본 추출은 클레버와 하리오 V60을 이용한 드립으로 진행합니다. 클레버 추출은 드립굵기로 그라인딩 후 20g/91도/330ml/2분 30초의 레시피를 따릅니다. 전반적으로 시중에 나온 초콜렛을 먹는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이 살아납니다. 은근하게 느껴지는 불맛(혹은 약간의 탄맛)이 흡사 토스트의 느낌도 전달하고요. 보리나 옥수수차에서 느껴지는 구수한 맛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커피가 가진 좋은 느낌들이 금방 풀이 죽어버린달까요. 하리오 V60드리퍼로 굵게 그라인딩하여 30g/91도/450ml/2분 45초의 추출을 진행했을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 모금의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이 치솟지 못하고 점점 풀이 죽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에어로프레스 추출은 블랙업에서 함께 보내준 가이드를 따라 진행해보았습니다. 드립굵기로 17g/92도/230ml/30+30초의 레시피를 따릅니다. 전반적인 느낌은 드립추출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배전의 강한 뉘앙스가 기구나 레시피를 다르게 해도 크게 변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맛이 안정적이라는 측면에서 이 부분은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드립으로 살리지 못했던 생동감이 에어로프레스로도 살아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약간의 산도가 느껴지는 추출이었지만 금방 풀이 죽는, 입안에서 살아나지 못하는 맛과 향들이 조금 아쉬운 한 잔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스프로프레스 추출을 진행합니다. 프렌치프레스 굵기로 20g/92도/300ml/3분의 레시피를 따릅니다. 이 추출에선 초콜렛의 부드러운 풍미가 조금더 은은해지고 고소해진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 느낌이 오래가지 않고 곧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연상케 하는 맛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오랜시간의 추출에도 떫은맛이나 탄맛 등의 디팩트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커피가 가진 안정성이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배전 혹은 그 이상의 커피가 가지는 매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커피가 가진 능력이 최대로 발휘될때는 기름이 흘러나오는 강배전에서 느껴진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약배전을 할 때 쉽게 디팩트가 드러나는 것처럼 결코 쉬운 로스팅 포인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커피를 태우지 않고 잘 익히는, 매력적인 로스팅 비프같은 포인트를 잡는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죠. 이번 블랙샷 블랜드는 강배전까진 아니지만 약배전의 시류에서 벗어나 미디움 포인트 혹은 그 이상을 지향하면서 스페셜티가 가진 매력을 극대화 하려는 시도가 엿보였습니다. 커피의 생동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중배전 이상의 로스팅포인트의 매력을 잡아내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단 생각을 해봅니다.

플라츠커피, 과테말라 라 라구나(Guatemala la Laguna)

길고 긴 명절 연휴 덕분에 2월 8일 로스팅된 플라츠 커피를 2주 가까이 지나서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선도가 유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리뷰를 하는게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커피 소비자들이 2주라는 유통기한을 완벽히 지키지 못할수도 있단 생각에 리뷰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심플한 디자인의 플라츠 커피 패키지에는 커피의 원산지와 간단한 테이스팅 노트만 적혀있습니다.

 

플라츠 커피의 과테말라 라 라구나(Guatemala la Laguna)는 약배전을 택했습니다. 향미를 잡기위해 많은 로스터들이 과감한 약배전을 하곤 하지만, 제가 만난 대부분의 약배전 커피들은 제대로 익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과연 2주 지난, 약배전의 플라츠 과테말라는 어떤 맛을 보여줄지 궁금했습니다.  

 

우선 대략적인 느낌을 알아보기 위해 V60을 이용한 드립을 해봅니다. 추출은 드립굵기로/30g/93도/450ml/3분의 레시피를 따랐습니다. 첫모금을 마신 순간, 플라츠의 과테말라는 수준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은한 자스민향, 꿀, 아몬드, 볶은땅콩의 느낌이 조화로웠으며 식으니 라임의 맛도 느껴졌습니다. 대부분의 테이스팅 노트는 플라츠 커피에서 제공한 것과 동일했으며, 분명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화로운 맛들이 어우러져 밸런스를 유지하는 약배전 커피를 오랜만에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주 지난 원두임을 감안했음에도 향미도 잘 잡혀있고 에프터 테이스트도 좋았습니다. 살살 간들거리는 봄바람같은 기분 좋은 맛이랄까요.

 

에어로 프레스는 기본 레시피를 따릅니다. 드립굵기에 17g/93도/220ml/2분 20초의 추출입니다. 드립 추출보다 깊고 밀도있는 과일의 신맛, 달콤하고 은은한 꽃향이 살아있습니다. 드립 추출부터 전반적으로 강하게 느껴지는 자스민의 향은 플라츠 커피가 과테말라 라 라구나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라임의 신맛과 사탕수수의 단맛 그리고 견과류의 고소함이 밸런스를 이루며 좋은 느낌을 전달해줍니다.

 

에스프로프레스 추출은 17g/93도/200ml/4분의 레시피입니다. 첫 모금은 다른 추출에 비해 많이 누그러진 맛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곧 자스민차를 연상케 합니다. 산도가 줄어들었지만 편안한, 설탕과 시럽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좋은 차에서 느껴지는 단맛이 슬슬 올라옵니다. 식으면서 은은하게 신맛도 올라오며 라임과 사탕수수의 느낌을 전해줍니다.

 

라 라구나는 워낙에 다른 로스터에서도 칭찬을 받던 생두였습니다. 저도 다양한 로스터를 통해 이 원두를 만나왔고요. 그 중에서도 플라츠의 약배전 로스팅은 확실한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디팩트가 없는 로스팅, 지향성이 분명하고 정확한 테이스팅 노트에는 아낌없는 칭찬을 전하고 싶습니다. 늦은 배송으로 2주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정도의 맛을 보여줬다면, 최상의 컨디션일때는 더 좋은 맛을 보여줄게 분명합니다. 한 종류의 원두로, 몇 번의 추출로 플라츠 커피를 판단할 순 없지만 이 로스터가 기본에 충실한 스페셜티 로스터라는 점은 알 수 있었습니다.

 

함께 전달받은 30g의 플라츠 블렌딩은 에어로프레스 추출을 통해 마셔봤습니다. 자몽의 쌉싸름하고 달달한 신맛이 연상되는 기분좋은 커피였습니다. 감귤이나 오렌지의 단맛도 느껴졌고요. 따뜻할때부터 식을때까지 느껴졌던 특유의 쌉싸름한 맛은 이 커피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에스프레소 추출을 했을때, 이런 부분이 강한 매력을 줄것 같단 생각을 해봅니다.

연연풍진을 보기에 앞서 카페 뤼미에르를 보았는데, 영화가 줄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깊고 다양한가를 알려준 담백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못할 무심한 음악이 흐르던 카페 신들과 요코가 장원예의 음악을 찾아다닐때 미묘하게 흐르던 음악들이 만들어내는 미장셴들은 오래두고 마셔도 질리지 않는 깊은 차의 향을 닮았다. 허우사우셴은 덤덤하게 주고받는 대사들과 과장 없이, 특별한 카메라의 움직임없이 도시의 삶을 그려내서 보는내내 내가 그 도시에 걷고 있음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한없이 잔잔한 이 영화에서 극적인 부분이라면 요코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밝히는 30분 정도쯤에서의 장면인데, 사실 이 또한 넘어가자면 조용히 넘길수 있는 그런 먹먹한 장면이다. 이 때문인지 특별한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터넷의 감상글에서 종종 혹평을 보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정의가 협소해서 그렇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마음을 읽어 커피를 내려주는 연남동의 이심커피가 조용한 단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 영화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담고있기에 왁자지껄한 맛집처럼 줄을 서지 않고도 편안하게 찾을수있는 조용한 단골 카페의 커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추천해주거나 좋다고 말해준 주변인들의 깊은 취향에 감사를 전한다.​

레드플렌트, 레드 오리진(Red Origin), 르완다 루붐부 스페셜티(Rwanda Ruvumbu Specialty)

 

합정의 숨은 스페셜티 강자 레드플렌트에서 맛볼 원두는 두 종입니다. 레드 오리진(Red Orgin)은 에티오피아 모모라(Momora), 르완다 루붐부(Ruvumbu), 콜롬비아 우일라(Huila)가 각각 4:4:2의 비율로 들어간 레드플렌트의 대표 블렌드입니다. 스페셜티 커피들 중에서도 개성이 강한 이 세 종류의 커피들이 어떤 조화를 이룰지 궁금해집니다.

 

싱글 오리진은 르완다 루붐부입니다. 르완다는 저에게 칡의 느낌을 강하게 전달하는 커피입니다. 어디서든 르완다를 마시면, 그 특별한 향미와 맛이 인상적으로 남았습니다. 레드플렌트에서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지 궁금한 생두입니다.

 

전반적으로 원두의 로스팅 정도는 약-중배전 정도인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원두를 접할때 잡는 레시피는 대부분 원두와 물의 비율이 1:1.5 혹은 1:2 정도입니다. 실제 레드플렌트의 추출도 그렇게 하였고요. 제 실수이긴 하지만 이렇게 레시피를 잡고 내린 후,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1:1의 비율을 권장하더군요.  

 

역시 아쉬움을 놓치지 않게 두 레시피 모두 추출을 진행했습니다. 첫번째 V60을 이용한 드립 추출 레시피는 드립굵기로/30g/93도/450ml/3분10초 입니다. 전반적으로 사과와 자두의 향미가 느껴집니다. 오렌지 티같은 느낌도 있고요. 하지만 레시피와는 다른 비율로 추출을 진행해서인지는 몰라도 달콤함 끝에 떫은맛이 강하게 전달됩니다. 흡사 오렌지의 껍질이나 덜익은 오렌지를 먹는 느낌이랄까요. 은은하게 과일향이 나고 식으면서 산미가 올라오지만 에프터테이스트도 약하고 상대적으로 밸런스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추출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시 드립굵기/30g/93도/300ml/2분 30초의 드립을 진행합니다. 붉은 과일이 주는 산미의 깊은 맛이나 테이스팅 노트에서 말한 캬라멜의 느낌이 느껴집니다. 확실이 인상이 강해졌단 생각이 듭니다. 다만, 목너김 후에 느껴지는 거친 맛과 떫은 느낌은 조금 남아 아쉬움을 주었습니다.

 

레드플렌트에선 에어로프레스 추출 역시 1:1의 비율을 권장합니다. 18g/93도/200ml/2분 30초의 추출을 진행합니다. 그라인딩 굵기는 드립굵기로, 스티어링은 물을 붓고 3-4번정도 해주었습니다. 이 추출에서는 청포도의 느낌이 은은하게 느껴지면서 단맛을 주었습니다. 오렌지의 플레이버도 있었고요. 하지만 약간 떫은맛은 여전했고 드립추출보다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이어서 진행한 에어로프레스 추출은 프렌치프레스 굵기로 18g/93도/180ml/4분의 추출을 진행했습니다. 전반적인 느낌은 드립, 에어로프레스 추출과 비슷했으나 뜨거울때의 떫은맛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커피가 식으면서 오히려 전반적인 맛과 향이 누그러들고 떫은맛또한 사라졌습니다. 흡사 식은 과일차를 마시는 듯한 느낌으로 마셨습니다만, 개성이 많이 줄어들어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싱글오리진 르완다의 추출은 드립굵기로/20g/93도/300ml/2분30초의 추출을 진행했습니다. 테이스팅 노트에 적혀있는 람부탄과 리치의 느낌은 르완다에서 맛볼수있는 특유의 테이스팅 노트입니다. 저는 이 맛을 칡의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고요. 드립으로 추출한 이 르완다에서는 강렬한 향과 맛이 모두 이와 일치하는 느낌을 전해주었습니다. 생두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단 생각이 들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상깊은 향미에 반해 바디감이 약하고 깊이감 또한 부족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천천히 식어가는 커피를 맛보며 여전히 인상깊은 람부탄의 느낌과 더불어 캐러멜의 맛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공한 레시피보다 조금 더 추출을 한 것이 문제였는지 식으니까 조금씩 떫어진다는 느낌은 지울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추출은 에어로프레스 추출입니다. 드립굵기로 18g/93도/200ml/2분 30초의 레시피로, 레드오리진과 동일한 레시피를 따랐습니다. 이 추출에선 드립 추출과 비슷한 맛이 느껴졌지만 개성은 조금 덜한 느낌이었습니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망고와 같은 과일에서 주는 단맛이 느껴졌지만, 그 외에는 강한 인상을 주진 못했습니다.

 

레드플렌트에서 제안하는 5일간의 숙성기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 원두 모두에서 느꼈던 단점을 항변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레드오리진 블렌드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입니다. 테이스팅 노트에 나와있던 복합적인 맛에 대한 설명이 저에게는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블렌드가 지향하는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달까요. 개성이 강한 세 커피가 조화를 이루기보다 서로 싸우는 느낌이 강하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드립추출과 에스프레소 추출을 모두 권장하는데, 제가 받았던 느낌이 에스프레소 추출을 할때는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드립과 에스프레소 추출이 모두 안정적인 블랜드를 만나는건 어렵단 생각을 해봅니다. 함께 마셨던 르완다는 매우 강렬했습니다. 개성이 통통튀는 이 원두가, 레드플렌트의 레시피에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헨리 머레이슨은 27살에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간질을 고치기 위해 정신외과 수술을 받는다. 이는 정신분열증이나 간질등의 뇌질환에 대해서 뇌의 일부를 잘라내는 '정신 외과'가 유행했던 60년 전의 일이다. 뇌의 측두엽을 일부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헨리는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간질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수술전 기억을 제외한 그 어떤 장기기억도 해내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이라는 책은 수술후 평생의 삶을 신경외과와 관련된 실험에 헌신했던 헨리머레이슨의 평전이다. 30초가 넘어가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헨리는 측두엽과 해마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데 큰 기여를 했고, 그 밖에도 뇌과학에 엄청난 발전을 도왔다. 문득 단기기억으로 가득찬 인생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하는 의문속에 책장을 넘기다가, 저자 수잰 코킨이 핸리 머레이슨의 삶을 유추해보는 짧은 구절을 발견하고 숨이 멎을듯한 먹먹함이 찾아왔다.

'막강한 기억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오직 현재시제만이 존재하는 시간'에 산다면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고 살수 있을까, '장기기억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두렵지만, 그럼에도 인생을 지금 이 순간으로, 30초의 경계선에서 완성되는 단순한 세계를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하고 생각하는 그녀의 말에 인생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생각하며 살짝 눈물을 흘렸다. 일부분만을 인용할까 하다가 이 부분만큼은 전체를 옮겨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있다면 일독을, 더 여유가 있다면 이 책을 사서 읽어보길 권한다.

 

-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수잰 코킨, 알마

P.128-130

단기기억에만 의존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헨리가 겪은 일은 틀림없는 비극이지만 정작 헨리 자신은 좀처럼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헤매고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헨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을 살았다. 수술을 받은 그날부터 처음 만나는 모든이가 그에게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라도 열린 마음과 신뢰로 대했다. 그는 고교 동창생들이 기억하는 조용하고 예의바른 헨리의 온화하고 상냥한 성품을 잃지 않았다. 우리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묻거나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야 하며 남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자신의 상화도 충분히 인식했다. 헨리는 1966년 마흔 살에 MIT 임상 연구센터를 처음 방문했다. 여행가방을 누가 챙겨주었냐는 질문에 그는 간단히 답했다. "어머니였을 겁니다. 그런 일은 항상 어머니가 하시니까요."

헨리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붙들게 되는 정신적인 닻, 그러니까 때로는 부담이 될 수 있는 애착이나 집착같은 것이 없었다. 장기기억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인것은 맞지만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살면서 겪었던 고통, 처참했던 실패와 정신적 충격이나 골치 아픈 문제에서 헤어나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이 무거운 쇠사슬이 되어 우리를 스스로 만들어 낸 정체성 속에칭칭 동여맨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 않은가?

옛 기억에 꽁꽁 싸여 '지금 여기'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불교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이 우리가 겪는 고통 대부분이 특히나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 속에 살면서 만들어내는 자기 안의 생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지난 시간과 사건을 재생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를 되뇌면서 불안감의 수렁에 빠져든다. 우리가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명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들숨과 날숨 혹은 특정한 신체 부위에 의식을 집중하거나 하나의 주문을 반복해서 왼다. 명상은 우리의 의식이 시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훈련하는 방법이다. 막강한 기억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오직 현재시제만이 존재하는 시간에 거하기 위해서다. 현재에 집중하는 수련에 오랜 시간을 바치는 명상자들도 있다. 헨리로서는 원치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많은 부분이 장기 기억과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계획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면, 헨리가 어떻게 상대적으로 스트레스 없는 삶을 누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거에 대한 회고나 미래에 대한 추측에 얽매이지 않는다. 장기기억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두렵지만, 그럼에도 인생을 지금 이 순간으로, 30초의 경계선에서 완성되는 단순한 세계를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벙커컴퍼니, 에티오피아 콩가(Ethiopia Yirgacheffe Konga), 케냐 카리미쿠이(Kenya Kirinyaga Karimikui)

이번에 테이스팅할 원두는 벙커컴퍼니의 에티오피아 콩가와 케냐 카리미쿠이입니다.

 

에티오피아 콩가는 이미 스페셜티 시장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원두입니다. 이미 다른곳에서도 많이 맛봤던 원두이기에 벙커컴퍼니는 어떤 접근방식을 택했는지 궁금해집니다. 네추럴 가공방식을 택했는데 이 포인트도 어떻게 살릴지 궁금하고요.

 

케냐는 1850m의 고고도에서 재배된 품종입니다. 지난번 FM커피의 리뷰에서도 케냐가 독특한 향미와 맛을 보여줘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벙커컴퍼니가 선택한 케냐는 어떤 맛을 보여줄지 궁금합니다. 에티오피아가 네추럴인데 반해 케냐는 워시드입니다. 둘의 뚜렷한 특징을 잡아가며 마셔보는것도 좋을것 같군요.

 

사진으로 보는 저 원두는 케냐입니다. 로스팅 포인트는 두 원두 모두 비슷합니다.

 

우선 에티오피아 추출입니다. 추출은 모두 4가지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추출기구는 클레버, 하리오 V60, 메탈콘필터, 에스프로프레스 입니다. 우선 하리오 V60을 보죠. 레시피는 드립굵기로/20g/92도/350ml/2분30초 입니다. 커피에선 살구의 맛과 패션프루츠가 느껴집니다. 조금 불안정해 보이는 산미도 나름 매력을 전해주고요. 라벤더티의 느낌을 주고 슬슬 자리를 잡는 산미는 블루베리의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식으면서 밸런스가 잡히긴 하는데 밸런스 측면에선 아쉬움을 남깁니다.

 

콘필터 추출은 드립굵기로/20g/92도/350ml/2분30초입니다. 페이퍼 추출보다 산미가 떨어지면서 매력이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오히려 차를 마시는듯한 느낌을 만들어줍니다. 흡사 라벤더 티 같달까요. 혀 끝이 살짝 아린 느낌도 느껴집니다. 드립굵기로/20g/93도/330m/2분 30초의 시간을 두어 내린 클레버 드립은 V60드립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음은 에스프로프레스 추출입니다. 프렌치프레스 굵기로/20g/91도/300ml/4분을 추출했습니다. 첫 모금에 약간 떫은 맛이 느껴집니다. 다시 식으면서 벨런스를 되찾는군요. 조금씩 식어가는 커피에선 아린 맛이 죽어가면서 라벤더향 살구의 맛이 느껴집니다. 사실, 동일한 추출을 케냐와 함께 진행하다보니 안정적인 케냐에 비해 에티오피아 원두가 가진 불안정함이 많이 부각된 부분도 있습니다. 조금씩 식어가는 커피가 안정감을 찾고 화사한 맛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오히려 장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케냐추출은 에티오피아와 동일한 조건에서 진행했습니다. 우선 립굵기로/20g/92도/350ml/2분30초 추출을 진행한 V60 추출입니다. 적절한 산미와 부드러운 바디, 안정감있는 밸런스와 화사한느낌이 좋은 인상을 전해줍니다. 감귤껍질, 복숭아, 바닐라, 감 등의 과일에서 나는 단맛이 고루고루 느껴집니다. 복합적인 단맛과 향미가 인상적인 커피더군요.

 

콘필터 추출은 역시 드립굵기로/20g/92도/350ml/2분30초입니다. 페이퍼드립보다 맛이 더 은은하고 부드럽습니다. 콘필터가 걸러내지 않은 오일은 페이퍼드립 추출보다 더 안정적인 맛을 제공합니다. 화사하진 않지만 묵묵한 깊이가 있고, 식어도 밸런스가 좋습니다. 드립굵기로/20g/93도/330m/2분 30초의 레시피, 클레버로 추출한 커피는 페이퍼드립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에티오피아보다 안정감이 좋습니다.

 

에스프로프레스 추출은 프렌치프레스 굵기로/20g/91도/300ml/4분을 추출했습니다. 4분을 추출했음에도 걸리는 맛이 없습니다. 갓 따라내린 커피에선 깊고 진한 단맛이 올라옵니다. 별다른 방법을 쓰지 않고 오랫동안 우려먹는게 좋다는건, 저에게 좋은 커피란 신호를 보내주는것과 같습니다.

 

딱히 로스터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제가 최근에 접한 스페셜티 커피들은 대부분 향미를 잡는다는 미명하에 심하게 언더추출을 낳는 로스팅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취향인지, 트렌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커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리조또를 만들어도 쌀은 익어야 하고, 누룽지를 만들어도 쌀을 태우면 안되는겁니다. 하지만 그간 제가 경험한것들은 익지않은 쌀로 만든 리조또를 먹는든한 느낌의 커피뿐이었습니다.

 

벙커컴퍼니의 커피에 높은 점수를 주고싶은건, 다른 로스터들과 달리 마실수있는 그리고 맛있는 커피를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상대적으로 알맹이가 작고 로스팅하기 어려운 에티오피아의 경우 추출 기구에 따라 단점을 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아쉬운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로스터라면 깊은 떫은맛에 몸서리를 치며 진행하지 않았을 에스프로프레스 추출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또한 두 브루잉원두 모두 커피가 일정한 방향성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싶습니다. 또한 식었음에도 맛을 유지하는것도 좋았고요. 좋은 커피가 아니라면 커피의 맛은 시시각각 변하고, 일정한 캐릭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브루잉추출이 주종목이 아님에도 이정도의 능력을 보여주었으니 더욱더 벙커컴퍼니의 에스프레소가 기대됩니다. 이 로스터의 블렌드는 적어도 드립으로 마셔볼만 하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모모스, 세레머니 블렌드

 

모모스 세레머니는 에티오피아 코체레 레코(Kochere)와 구지 수케(Guji Suke)를 각각 7:3의 비율로 섞은 에스프레소 블렌드입니다. 레코와 수케는 각각 워시드와 네추럴 가공방식을 택했습니다. 같은 국가에서 재배되었지만, 가공과정이 다른 콩을 섞은 블렌드는 이미 다양한 로스터에서 실험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개성으로 그 능력도 인정받았고요. 모모스에서 겨울 블렌드로 택한 '세레머니'는 어떤 맛을 보여줄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리뷰에서와 별 다를바 없는 외관입니다. 모모스의 로고, 블렌드에 대한 설명과 로스팅된 날짜가 적혀있습니다. 여전히 에그트론 넘버가 적혀있는건 의문입니다. 로스팅 단계를 좀 더 세세하게 파악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까요.  

 

처음 커피를 받아들곤, 하리오 V60으로 추출을 진행했습니다. 드립 굵기보다 조금 굵게/30g/92도/450ml를 추출했습니다. 추출 할 때 약간의 풋내가 났고, 이것이 추출된 커피의 떫은 맛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뒤로 나타나는 부드러운 딸기맛의 커피는 인상적이었지만 여전히 떫은 느낌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추출 디팩트가 있을수도 있단 생각에 모모스에서 제공한 레시피를 따라봅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세레머니 블렌드의 추출 가이드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이드를 따라 드립굵기로 17g/87도/220ml의 추출을 진행했습니다. 40초동안 물을 부어주고 스티어링을 했습니다. 20초동안 천천히 압력을 가해 추출을 했고요. 결과는 인상적이었습니다. 크리미한 딸기맛과 부드러운 바디가 인상적이더군요. 청포도의 달달함과 오렌지의 플레이버가 느껴졌습니다. 청량감또한 좋았고요. 하지만 조금씩 걸리는 거친맛과 에프터의 은은한 떫은 맛이 가끔씩 느껴졌습니다.

 

다음은 프렌치 프레스 추출입니다. 굵게 그라인딩한 원두를 18g/92도/250ml/2분 30초의 레시피를 따랐습니다. 에어로프레스 추출에서의 테이스팅 노트와 비슷한 뉘앙스를 주었으나 개성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 났습니다. 배전도 때문인지 오일리한 느낌이 어설프게 느껴져 어색함도 있었습니다.

 

브루잉으로 세레머니를 즐기고자 할 때 권장하는 추출은 에어로프레스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 추출이 조금 강렬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역시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레시피대로 프랜치프레스를 이용하시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에스프레소를 위한 블랜드를 테이스팅 하고 있습니다. 제가 테이스팅했던 대부분의 블렌드는 에스프레소로 추출할 경우 디펙트가 나지 않게 잘 조절해 추출한다면 좋은 한 잔의 커피가 될겁니다. 우유와의 결합 또한 커피의 맛을 좌우하기도 하니 제 리뷰는 이 부분에 대한 것도 놓치고 있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좋은커피에 대한 이상은 '가용성이 높은' 커피입니다. 커피를 처음 받고나서 저는 대부분 하리오 드리퍼를 통해 거칠게 추출하거나 클레버로 2-3분의 시간을 두어 추출을 진행합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드립굵기로 그라인딩한 커피를 에어로프레스를 통해 4-5분 동안 우려내 추출을 하는겁니다. 잘 볶은 커피라면 이 모든 추출에서 쉽게 단점을 보이지 않습니다. 원두 자체가 가진 결점이 크지 않기 때문이죠. 변수에 민감한 커피가 좋은 바리스타를 만난다면 훌륭한 한 잔의 커피가 탄생할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원두 구매자들은 까다로운 변수를 통제할만큼 조건을 갖춰놓고 커피를 내리지 않습니다. 스페셜티 커피 시장과 마주한 저의 생각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좋은 커피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좋아야 한다는 것이죠. 스페셜티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저의 오감을 감동시켰던 커피들이 많았습니다. 그 커피들은 대부분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좋은 커피였죠.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가지고 커피를 바라보기에 좋은 커피들에 제 손에 들어오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블랙업 커피, 셀리나(Selina) 블렌드

공교롭게도 세차례 연속 에스프레스 블렌딩을 리뷰하게 됐습니다. 추출환경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는 이상 상세한 리뷰가 불가능하다는건 여러차레 말씀드렸지만, 맛있는 커피라면 어떻게 내려도 맛있기에 브루잉을 통한 블렌드 리뷰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커피로스터 블랙업커피의 에고 블렌드 셀리나입니다. 홈페이지에는 '이고'라고 나와있더군요. 몽타주 커피를 비롯하여, 철학용어로서 결코 쉽지않은 이름을 붙여놓은걸 보면 저는 머리가 아파집니다. 수많은 개념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대체 이렇게 어려운 개념을 어떻게 커피로 풀어내는거지?'라는 생각도 들곤합니다.

 

케냐 카힌두 AA가 70%의 비율로 들어가있습니다. 케냐 니에리 지방에서 생산되는 이 커피는 기본적으로 살구와 꽃향이 지배적인, 강한 산미가 인상적인 커피입니다. 블랙업에서 제공한 테이스팅 노트의 지분은 바로 여기서 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품질의 케냐커피가 블랜드에서 어떤 색을 뿜어낼지 궁금하군요. 과테말라 산 안토니오 차귀테가 남은 30%의 비율로 케냐의 독주를 막아줍니다.

 

패키지에는 별 다른 브로슈어가 없었습니다. 원두 봉투 뒷면엔 간단한 테이스팅 노트가 적혀있고요. 브루잉 추출을 위한 가이드를 참고해 추출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참고했습니다. 추출 가이드는 기구를 판매하는 섹터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추출가이드에대한 조금 번거로운 접근이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원두의 색깔은 대략 이렇습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시티 단계에서 배출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전반적인 뉘앙스를 알아보기 위해 클레버 추출을 진행합니다. 드립굵기로 그라인딩 후 20g/93도/330ml/2분 30초의 추출을 진행합니다. 거친 산미와 과일껍질, 특히 자몽껍질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덜 익은 사과의 풋풋한 신맛도 느껴지고요. 부드럽고 편한 느낌을 주진 않았습니다. 바디는 중간정도, 신맛도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고소한 느낌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혀끝을 아리게 하는 떫은 맛이 조금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레시피를 변경해 클레버 추출을 재차 진행합니다. 드립굵기보다 조금 굵게 그라인딩 후 20g/93도/330ml/2분의 레시피로 추출했습니다. 이전 추출보다 거친 맛들은 누그러들었지만, 커피가 식으면서 느껴지는 떫은 맛은 여전합니다. 다시 이 부분을 반영하여 하리오 V60드리퍼로 굵게 그라인딩하여 30g/93도/500ml/3분의 추출을 진행합니다. 빠른 속도로 푸어오버를 하면서 최대한 잔미를 잡아보려 했습니다. 은은하게 체리나 달달한 맛이 느껴지긴 하지만 바디는 더 약해집니다. 슈가브라우닝의 느낌이 지배적이며 고소하고 은은한 단맛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커피가 식었을때는 여전히 떫은 맛이 살짝 느껴집니다.

 

3번의 브루잉추출후에 에어로프레스 추출을 진행합니다. 드립용보다 굵게 그라인딩하여 17g/92도/225ml/30초동안 물을 붓고, 50초 기다린 후, 10초동안 젓고 40초동안 프레싱하는 레시피를 따라봅니다. 갓 추출된 따뜻한 커피는 여태까지의 추출중에 테이스팅 노트와 가장 훌륭한 일치를 보여줍니다. 꽃잎의 느낌과 산도높은 자몽의 느낌, 중간바디와 신맛, 사과나 천도복숭아같은 맛들이 입안을 장식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넘김 후에 아린맛이 남는건 여전합니다. 식은후에 남은 떫은맛도 조금밖에 느껴지지 않는군요.

 

에스프레소용 블렌드를 블렌딩으로 추출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추출 결과물이 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공통적으로 느껴졌던 식은후의 떫은 맛이 가장 아쉬웠고요. 하지만 에어로프레스로 추출했을때 커피가 뿜어내는 향미는 이런 단점들을 가릴수 있을만큼 좋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조금은 거친 느낌은 저에게 이드(id)를 통제하고 절제하는 에고(ego)의 느낌보단 오히려 에고에 가려진 이드 같단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일전에 리뉴얼 전의 블랙업 커피인 커피공장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크기부터 다른 카페와 남달라서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죠. 반면 가장 강렬하다고 소개했던 에스프레소가 우유와 만났을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브루잉 추출의 아쉬움속에 블랙업커피를 방문해 커피를 마셔보고 싶단 생각을 해봅니다. 전반적으로 강렬한 외장의 패키지의 커피가 블랙업커피로 변신한 커피공장의 에스프레소를 어떻게 바꿔놨을지 궁금합니다.

http://www.theguardian.com/music/musicblog/2014/dec/09/kyung-wha-chung-i-have-always-welcomed-children-to-my-concerts사진출처 http://www.theguardian.com/uk

 

1. 12년만에 영국 무대에 선 정경화를, 청중들은 정성을 다해 맞이해주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후 66세의 노장에 대한 기사는 청중의 기침으로 가득찼다.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하기전, 정경화가 한 어린 아이를 지적하며 '저 아이는 좀 더 큰 후에 공연장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영국 언론은 레전드 바이올리니스트의 복귀무대 헤프닝을 기사화했다. 몇몇 평론가들은 '그 공연에서 기침을 한 건 아이들 뿐만이 아니었다'거나 '정경화의 지적에 50명이 넘는 아이들은 잠에 빠져있을수밖에 없었다'고 공연 상황을 전했다. 타임지의 한 음악평론가는 그녀가 아이에게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그녀야 말로 좀 더 나이가 들어서 공연장을 찾아야할것 같다고.
부정적인 의견만 있었던것은 아니다. 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정경화가 '공연중의 기침은 훌륭한 연주를 방해하는 분명한 요소다. 누군가는 공론화 했어야 할 문제'라며 정경화의 대담함을 칭찬했다. 다른 문화 평론가는 '지금 우리의 삶은 클래식같은 조용한 음악과 침묵에 익숙치 않다. 청중들은 고요한 공간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며 정경화를 우회적으로 옹호했다. 이에 공연을 개최했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는 이에 대한 단 한건의 항의도 없었다고 전했다.
공연장에서 청중의 태도만큼이나 클래식 애호가들사이에서 논쟁적인 주제도 없을것이다. 지금처럼 관객들은 침묵을 유지해야했던 공연문화가 성립된건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라니 이런 논쟁이 일어나는것도 당연한 일일것이다. 영국의 청중들은 이 지지부진한 논쟁의 당사자로서 성숙하게 문제와 마주했다. 연주자의 오만함에 불평하고 아이들이 받은 모욕을 되돌려주기 위해 공연 관계자들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는 부분이 그렇다.
공연을 본격적으로 찾아다니면서 나도 어떻게 공연을 보아야하는지 배울수있었다. 공연장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는 강요나 금지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것이 시민들의 경험으로 해결해나가야할 문제라고 본다. 무엇을 어떻게 듣고 감상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 런던의 한 공연은 의미있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서울시향 지휘자 정명훈의 투잡논쟁이며, 대표자리에 금융권 인사를 앉혀놓고 효율성 운운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문화가 산업이 되는순간 예술 밖의 논쟁은 격렬해지고 본질은 흐려진다. 서울시향 사태로 느낀바, 우리나라의 예술은 연봉과 예산의 문제이며 정치적인 싸움의 또 다른 주제에 불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http://www.bbc.com/news/entertainment-arts-30327567

 

2. 세계적인 이슈가 된 정경화 콘서트의 기침사건에대한 그녀의 칼럼. 콘서트는 음악가와 관객이 소통하는 곳이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드물게 침묵속에 침전할수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녀는 스토코프스키를 인용한다. 훌륭한 음악은 침묵이라는 캔버스 위에서야 완성될수 있다. 정경화는 글에 아직 이런 문제가 이슈가 된다는건 클래식이 죽지 않았다는 위트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침묵의 아름다움과 그 속의 소통을 이해했으면 한다는 얘기또한 담아냈다.

 

http://www.theguardian.com/music/musicblog/2014/dec/09/kyung-wha-chung-i-have-always-welcomed-children-to-my-concerts

 

3. 클래식은 단순히 '오래된 서양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정경화 콘서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영국인들의 논의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침묵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순한 음악감상을 넘어 소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클래식 공연장과 같은 침묵과 함께 할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몇몇 평론가들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클래식 음악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무엇인가로 두고 껄끄러운 논쟁을 하는것은 내가 보기에도 참 힘겨운 일이다. 숨쉬기도 힘들만큼 모든 것이 목을 조여오는 생활에 예술이 없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 우리는 지금 그 '예술'을 지키는 일에 대해 보다 섬세한 논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최유준 음악평론가의 서울시향 사태에 대한 글을 첨부한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412112054505

 

 

개복치 생존게임은 기존의 육성게임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처음 키울때는 바다거북만 봐도 질겁해 돌연사하는 개복치의 삶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그렇게 죽고 다시 살아가는 개복치의 삶이 우리내 인생임을 인지하고 다가오는 개복치의 역경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입한다. 죽어라 공부해 수능을 보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군대, 연애, 취업 그 어느하나 녹록한게 없다. 우리는 그 앞에서 어이없는 이유로 수없는 돌연사를 당하고 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 왕관을 쓰고 수염을 쓰다듬하며 살아가던 개복치 왕(Mola King)의 삶을 즐기다가도 취업을 앞두고 스펙의 문에 질겁해 돌연사를 한다든가 입대 후 선임들의 어이없는 갈굼에 오줌을 저리다가 돌연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복치력은 돌연사의 역사를 통해 이뤄진다. 피로를 권유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늘 수심을 일러주지 않아 어린날개가 물결에 젖어 서글퍼진 나비요, 햇볕을 쬐러 나갔다가 말라죽는 개복치다. 결국엔 50번이 넘는 돌연사를 통해 저 먼 바다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개복치 게임의 엔딩처럼, 우리는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결국은 이 모든 돌연사를 이해하고 감당할수있는 그릇이 되는거다.

돌연사를 거듭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두려움에 휩싸여 눈앞에 있는 정어리와 가리비를 먹지도 못하고 나의 작은 바다에서 살 것인가. 우리는 작은 스마트폰 안에 개복치를 바라보며, 그의 영문 이름이 몰라몰라(Mola Mola)임을 떠올리며 우리내 삶을 생각하고 또 허탈한 인생을 생각하는 것이다.

 

 

커피 몽타주, 블랜드 센스엔 센서빌리티(Sense & Sensibility), 비터스윗라이프(A Bitter-Sweet Life)

 

커피 몽타주의 두 블랜드의 이름은 각각 이성과 감성, 비터스윗라이프입니다. 이성과 감성은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을 떠올리게 하고, 비터스윗라이프는 록밴드 더 버브(The Verve)의 히트곡 비터스윗심포니(Bittersweet Symphony)를 떠올리게 합니다. 커피와 동봉된 설명서에서 센스엔 센서빌리티 블랜드는 이성과 감성을 신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으며 비터스윗 라이프는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보여주는 블렌드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람의 이성과 감성, 인생이 커피의 단맛, 쓴맛, 신맛으로 변신한거죠. 저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 이 어려운 문제를 커피에 담아서 풀어냈다니 패키지를 뜯기 전 부터 기대가 커집니다.

 

이성과 감성 블랜드입니다. 쉽지않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블랜드는 케냐 가톰보야(Kenya Gatomboya), 예가체프 코칸나(Yirgacheffe Kokanna), 니카라과 산타 헤마(Nicaragua Santa Hema)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케냐 가톰보야는 케냐식 워시드 프로세스를 거쳤고 오렌지, 블랙커런트, 자두의 향이 매력적인 커피입니다. 테이스팅 노트에 나와있는 맛들이 케냐의 테이스팅 노트와 겹치는걸로 보아 이 블렌드의 중심이 되는 커피가 케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좋은 케냐들을 맛이 맛보았기에, 가톰보야의 활약에도 기대를 걸어봅니다.

 

패키지에 별다른 정보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동봉된 안내문과 홈페이지에는 로스팅 포인트와 블렌딩 구성, 테이스팅 노트와 에스프레소 추출 가이드가 적혀있습니다. 브루잉 가이드는 홈페이지 ENJOY탭에 그림과 함께 나와있고요.

 

가스를 배출시키는 패키지는 봉투에 아로마벨브를 달아주는 방법도 있지만, 이처럼 브리스 봉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자그마한 밴드 사이의 틈으로 가스가 배출됩니다.

 

센스앤센서빌리티는 브루잉과 에스프레소 모두를 겨냥한 블렌드입니다. 우선은 핸드드립으로 추출을 진행합니다. V60드리퍼에 30g/93도/450ml/3분의 추출을 합니다. 첫 모금에서 약간의 탄맛이 느껴집니다. 이후에는 단맛이 걸쭉하게 느껴지고 끝에 쓴맛이 조금 느껴집니다. 오렌지나 자두의 풍미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흡사 과일청을 연상시킵니다. 이런 전반적인 과일맛과 신맛이 여운을 길게 남깁니다. 테이스팅 노트엔 '밝고 달다'라고 하는데, 브루잉된 커피는 밝다기보단 중후한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에어로프레스 추출은 커피 몽타주 홈페이지의 레시피를 따랐습니다. 에어로프레스를 뒤집어놓고 18g/90도/90ml+90ml/30초+20초+20초의 레시피로 추출을 진행했습니다. 두번째 90ml를 부을땐 스티어링을 해 주었고, 추출시 소요시간이 20초가 걸리도록 조절을 했습니다. 그림과 함께 있는 세세한 레시피대로 커피를 내리니 맛이 좀 더 살아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브루잉에서 걸렸던 거친 느낌은 줄어들고 더욱 농축된 맛이 느껴집니다. 신맛과 단맛의 조화가 두드러지고 자두, 파인, 오렌지의 느낌도 그려집니다. 핸드드립의 레시피에서 걸렸던 약간의 탄맛과 쓴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핸드드립으로 추출시 위의 레시피보다 온도를 조금 더 낮추고 굵기를 조금 굵게 그리고 빠르게 내린다면 더 맛있는 레시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전에도 브루잉과 에스프레소를 동시에 공략한 블렌드를 마셔봤습니다. 몽타주의 센스엔 센서빌리티 블렌드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진 이런 블렌드 중에서도 가장 높은 완성도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점은 남습니다. 지향성이 모호하다보니 결국 어느정도의 부족함이 생기는 것이죠. 스페셜티 커피의 장점을 잘 이용하여 향미를 더 살리고 밝은 느낌을 강조한다면 브루잉 블렌드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높아지는 브루잉에 대한 관심을 고려하여 핸드드립이나 각종 브루잉틀의 특성을 고려한, 목적이 더 뚜렷한 블렌드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라 센스엔 센서빌리티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것 같은 아쉬움은 여전합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소개할 비터스윗라이프 블렌드는 애초부터 '에스프레소'를 목표로 한 블렌드입니다. 인도 마이소르 너겟 에스프라 볼드(India Mysore Nuggets Exta Bold)와 센스엔센서빌리티 블렌드에서도 사용된 예가체프 코칸나가 6:4의 비율로 사용되었습니다.

 

 

로스팅 포인트는 센스엔센서빌리티 로스팅보다 조금 더 진행됐습니다. 2차 크랙 직전에 배출된 비터스윗 블렌드입니다.

 

이전 추출의 경험과, 원두의 특성을 고려하여 에어로프레스 추출을 진행합니다. 18g/90도/90ml+90ml/30초+20초+20초의 레시피입니다. 추출방식도 센스엔 센서빌리티 블렌드와 동일하고요. 비터스윗 블렌드의 에어로프레스 추출은 쓴맛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뒤에는 은은한 향미와 신맛이 강하게 올라옵니다. 바디감은 묵직합니다. 쓴맛이 지배적이며 다크초콜렛과 슈가브라우닝을 연상시킵니다. 단맛이 밀리는 느낌이 느껴집니다만, 우유와의 결합을 고려한다면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맛이기도 합니다. 브루잉으로 마시기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비터스윗 블렌드였습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모카포트 추출을 진행합니다. 에어로프레스 추출보다 단맛이 더 사는 느낌이 드는군요. 오히려 에어로프레스에서 인상적이었던 쓴맛이 줄어든것 같습니다. 우유와 결합했을땐 달달함이 더 강해지고 쓴맛은 마지막에 가서야 느껴졌습니다. 시중에서 사먹는 커피우유같은 맛이 느껴진달까요. 시럽을 섞지 않아도 은은하게 찾아오는 단맛이 매력적이네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레시피를 따라 내린다면 브루잉에서 맛보지 못한 즐거움을 경험할것 같습니다. 단맛과 함께 쓴맛도 살아나는, 몽타주의 카푸치노가 그려지는군요.

 

에스프레소 추출 환경에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에스프레소를 목표로한 블렌드를 테이스팅 하는건 한계가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에스프레소를 위한 블렌딩인 비터스윗라이프 블렌드의 경우는 더 그렇고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반적인 느낌만 참고하시길 권장합니다.

 

앞서 브루잉과 에스프레소 추출을 동시에 고려한 블렌드에 대해 언급한바 있습니다. 몽타주의 커피는 브루잉을 위한 블렌드로도 아쉬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매번 이런 목표를 가진 원두를 맛볼때마다 이것이 블렌드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에스프레소 추출에서 이 블렌드들이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브루잉 추출에 있어서는 블렌드가 가지는 강점이 도드라지지 않는게 사실입니다. 이런 아쉬움 속에서 오직 핸드드립과 브루잉을 위한 블렌드를 수년간 연구하고 있는 카페 몇 곳이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그 카페의 블렌드 들에선 다양한 스페셜티 원두의 결합이라는 이미지보다 카페와 로스터를 연상케 하는, 그 카페에 들어서야만 느낄 수 있는 오래된 바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카페에선 들어서자마자 '블렌드 한 잔'이라는 주문을 할 수 있게 되죠.

 

몽타주의 커피에서 아쉬움을 느낀다면 이런 카페의 모습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사는 제 취향 때문일수도 있단 생각을 합니다. 역시 취향의 문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잎의 색. 마당을 청소하다 라일리랑 그 색을 감상했다.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지만 이렇게 기록해두지 않으면 후회할것 같아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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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카페, 블랜드 클래식(Classic Blend), 이탈리안 잡(Italian Job), 푸른 밤(Blue Night)

 

엘카페의 세 가지 블렌드 클래식, 이탈리안 잡, 푸른밤은 모두 에스프레소 추출을 염두한 로스팅입니다. 브루잉을 할 경우, 에스프레소를 위한 블랜딩이 빛을 보지 못할수도 있지만 전반적인 윤곽은 파악할수 있습니다. 이번에 진행할 원두 리뷰는 엘카페의 세가지 블랜드가 가진 방향성과 윤곽을 파악하는 수준에서 진행해보았습니다.

 

우선 패키지부터 살펴보죠.

 

 

엘카페의 원두를 받았을때 가장 놀랐던건 패키지였습니다. 다른 스페셜티 카페의 패키지와는 다르게 아로마벨브도 달려있지 않고 실링도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탈리안잡 블랜드는 포장이 살짝 열려있었습니다.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스페셜티 업계의 트렌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포장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블랜드 설명을 적어두는 안내문에서도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클래식 블랜드 패키지에 붙어있는 원두의 종류와 안내서에 적혀져있는 블랜딩이 달랐기 때문이죠. 포장 봉투에는 과테말라 인헤르또와 에티오피아 G1이, 안내문에는 엘살바도르 산타리타와 에티오피아 시다모 G3가 적혀있었습니다.

 

 

푸른밤과 이탈리안 잡 패키지입니다. 봉투 위에는 로스팅 날짜와 로고가 간단하게 적혀있고, 동봉된 안내문에 각각의 블랜드에 포함된 원두와 추출 가이드가 나와있습니다. 블랜딩에 사용된 원두들에 엘카페에서 직거래하는 원두가 포함되어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농장에 대한 설명과 생두의 특성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엘카페가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패키지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추출을 진행해봅니다. 우선 클래식 블랜드입니다.

 

추출에 사용된 원두는 모두 드립용 그라인딩을 했습니다. 하리오 V60 드리퍼를 이용하여 20g/91도/300ml/2분 10초의 추출로 클래식 블랜드를 테이스팅 해봅니다. 한모금 마셨을땐 초콜렛 풍미와 몰트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끝에는 아련한 쓴맛이 느껴지고요. 하지만 입안을 채우고 있던 향미는 금방 사라집니다. 살짝 떫더름한 맛도 느껴지는군요. 산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몬드나 초콜렛맛이 느껴지면서 거친 불맛도 살짝 올라옵니다. 식을수록 쌉싸름한 느낌이 강해지고 풍미가 누그러진 몰트의 느낌이 강해졌습니다. 다시 드립  30g/93도/450ml/3분의 추출을 다시 진행해보았습니다만,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에스프로프레스 추출은 역시 드립굵기 17g/91도/260ml/4분의 추출을 진행합니다. 물을 붓고 저어주어 원두와 물의 접촉을 유도했습니다. 드립 추출보다 바디감이 느껴져 안정적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풍미가 오래가진 않습니다. 이런 단점들이 브루잉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에스프레소 추출을 가정해 모카포트를 써보았습니다. 고소한 아몬드와 몰트의, 초콜렛의 풍미가 느껴졌지만 역시 강하지는 않습니다. 산미와 개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있지만 안정적인 맛을 준다는건 이 블랜드가 엘카페의 오랜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일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이탈리안잡입니다. 패키지가 살짝 열려있어서 걱정스러운 블랜드이기도 했습니다. 로스팅 후 2일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별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이탈리안 잡 블랜드는 다른 블랜드와는 달리 배전도가 살짝 높았습니다. 이를 고려하여 브루잉 추출은 드립굵기로  20g/90도/280ml/1분 30초의 레시피로 진행합니다. 블랜딩에 포함된 엘살바도르 엘베티아와 에티오피아 시다모 때문인지 약간의 과일맛과 산미가 느껴집니다. 살짝 누그러진 상큼함을 뺀다면 뉘앙스는 클래식 블랜드와 비슷합니다. 에프터테이스트에 풍미가 살아나긴 하지만 약간 떫은 느낌도 느껴집니다.

 

에스프로프레스 추출은 17g/91도/260ml/4분의 레시피로 클래식 블랜드와 동일하게 추출해봅니다. 바디감이 살아나면서 핸드드립에 비해 맛도 조금 깔끔해집니다. 안정성이나 밸런스 면에서는 클래식블랜드보다 이탈리안 잡이 조금 낫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푸른밤은 시즈널 블랜드입니다. 우유와의 결합을 생각해 만들었다는 설명이 안내문에 나와있습니다. 브루잉 추출은 20g/92도/300ml/2분의 레시피를 따릅니다. 껍질을 거칠에 벗긴 자몽 느낌이 강하게 풍겨옵니다. 이전 블랜드들에 비해 풍미와 산도가 살아나지만 거칠고 떫더름한 느낌이 있습니다.

 

오히려 에스프로프레스를 만났을때 맛이 조금 안정적으로 변합니다. 페이퍼드립을 통해 흡수되는 오일이 블랜드의 밸런스를 무너뜨렸나봅니다. 드립굵기로 17g/91도/260ml/4분의 레시피를 따른 커피에선 풍미와 산도, 바디감이 밸런스를 이룹니다. 하지만 역시 강하지는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엘카페의 블랜드는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것 같습니다.

 

에스프레소 블랜드를 브루잉으로 테이스팅했다는 점, 볶은지 1~2일이 지난 시점에 맛을 보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테이스팅이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풍미나 산도도 강한 압력이 가해지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들어가면 진가를 발휘할수도 있을겁니다. 종종 에스프레소 블랜딩을 브루잉해도 강한 개성을 드러내는 원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엘카페는 이와는 조금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듯 싶습니다.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취업시장에서 6개월 이상의 경력 단절은 구직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대학생활동안 쉼표를 찍고자 했던 휴학은 면접장에서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심지어는 군휴학동안에도, 복무기간 중에도 무엇을 했는지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취업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봉사활동을 하고, 자격증을 따고, 대외활동을 꾸준히 이어가야한다. 휴학 기간은 인턴쉽이나 어학연수와 같이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활동과 연결되어야 한다. 군 복무기간에도 휴가는 달콤해선 안된다. 토익과 외국어를 섭렵해야 하며 간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야간 대학이라도 지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에게 자유가 있는, 모든것이 가능한 긍정의 시대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질병과 물리적 제한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진 현대사회는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이 가득한 근대사회와는 개념이 다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억압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초긍정 사회에서 경쟁을 뚫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들이 만든 성공의 메뉴얼은 간단하다. 아프니까 청춘이어야 하고, 천 번은 흔들려야 단단해 질 수 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계발하여 자아를 완성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을거야', 그들은 다그치지 않고 따뜻한 말로 격려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하지 못함을 탓한다. 자아를 채찍질하는 현대사회의 맹점은 사람들을 구조맹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사람들은 자신이 취업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의 탓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비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업은 고용의 탄력성을 위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신규 채용보단 경력직을 뽑으려한다. 정부는 도시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개발하여 도시의 빈틈을 없앤다. 과도한 개발로 이한 부동산 과열은 살 곳은 많지만 누구나 살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정부와 기업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이룩하려 한다. 그런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가능성의 모토 아래 착취하기 가장 쉬운 부품이 된다.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회는 결코 발달한 사회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경쟁하는 세렝게티 초원의 표범의 무리에서나 관찰 가능한, 원초적인 생존법칙이다. 동물들은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 드넓은 초원에서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한다. 그들은 사냥한 먹이를 먹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잠을 자는 순간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섹스는 유희가 아닌 번식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목숨이 위협을 받는 순간에는 당장 모든것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늘어지게 하품하고, 사색에 잠기며 춤을 추거나 새들의 노랫소리를 즐길 여유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자랑한다. 끊임없이 소식이 쏟아지는 SNS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와 풍요의 초원에서 이처럼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쟁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만큼이나 흔들리고 아팠어, 그리고 너희들에게 자랑할만한 타이틀을 얻었어' 흔들리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사색에 잠기는대신 멀티태스킹에 능한 타인들의 성공사례를 자신을 위한 채찍질로 환원시킨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틀비는 멀티태스커가 되라고 외치는 자신의 고용주인 변호사에게 이렇게 답변한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I would prefer not to'. 변호사가 써내려간 문서를 끊임없이 복사해내는 필경사의 삶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노동자의 삶처럼 비극적이다. 더 비극적인건 더 이상의 멀티태스킹을 거부한 바틀비가 텅 빈 사무실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모습이다. 우리에겐 긍정의 힘을 거부할 능력이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선사한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고작해야 70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이 얇은 철학책을 또 다시 요약하고 설명하는건 불필요한 일일것이다. 집중해서 읽는다면 누구나 2-3시간이면 피로 사회를 읽을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결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바쁜 와중에 급하게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긴 책을 읽는 시간보다 더 긴 호흡을 담아 사색을 하고 행간을 읽어내며 이 책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이 선사하는 고요한 침묵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피로사회를 돌아봤으면 좋겠다.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우리는 피로한 노동계급의 소박한 저녁상을 마주한다. 풍성하지 않지만 하루에 감사할 수 있는 감자 앞에서 그들은 서로의 피로를 보듬어준다. 우리는 어떤가. 힘든 하루속에, 축 처진 어깨에 피로를 가득담은 우리는 '왜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는가'에 대해 한탄한다. 쏟아지는 긍정의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피로사회의 현대인에게 한병철은 잔잔한 공감을 유도한다. 부정의 피로에서 긍정의 피로로, 긍정의 사회에 가득찬 피로를 함께 나누며 공감할수 있는 피로로.

이 글은 블랙워터이슈(Black Water Issue, http://bwissue.com/)의 블랙빈이슈 코너에서 진행되는 원두리뷰입니다. 해당 링크를 따라가시면, 글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bwissue.com/beaninfo/70698

 

FM 커피 하우스, 코스타리카 라스 라자스(Costarica Las Lajas), 케냐 키간조(Kenya Kiganjo)

 

부산 스페셜티 커피 로스팅의 선두주자답게, FM 커피하우스의 생두 선택은 훌륭합니다. 코스타리카 라스 라자스, 케냐 키간조 모두 개성이 강하고 품질도 좋은 커피입니다. 우선 코스타리카의 패키지부터 살펴보죠.

 

코스타리카 라스 라자스는 1380m의 그다지 높지않은 고도에서 재배된 커피입니다. 하지만 좋은 품질의 커피를 만들어내기로 유명한 농장이기도 하죠. FM 커피하우스에서 선택한 코스타리카는 알마네그라(Almanegra)가공을 거쳤습니다. 이 가공방식은 커피체리를 수확하자마자 백에 넣어서 그늘 건조시키는 과정을 30일간 반복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두는 다른 프로세싱에서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향미와 깊은 단맛을 가지게 되죠. 이 농장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잘 익은 생두를 다양한 방식으로, 깔끔하게 프로세싱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생두의 특성을 잘 파악한 FM 커피하우스의 로스팅은 패키지를 뜯기 전부터 달달한 딸기향을 널리 퍼트릴만큼 풍부한 향기를 내뿜었습니다.

 

케냐 키간조는 1700-1900m의 고고도에서 자란, 고품질의 생두입니다. 케냐 농장들은 철저한 국가의 관리 속에 고품질의 생두를 출하하기로 유명합니다. 동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부유한 케냐는 프로세싱 설비도 비교적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생두의 품질도 좋습니다. FM 커피하우스에서 선택한 케냐는 완전 수세식을 택했습니다. 브루잉 결과에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완전 수세식의 생두임에도 커피 자체는 굉장히 다양한 풍미를 뿜어내고 있을 정도로 강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패키지에 포함된 원두 정보는 생두의 재배 고도를 제외하곤 소비자가 필요한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의 경우, 독특한 가공방식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케냐 또한 상세한 테이스팅 노트와 함께 필요한 정보들을 간략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브루잉 가이드의 경우, 에어로프레스와 클레버의 추출을 적어두었습니다. 브루잉 가이드에 나와있는 기구들의 대표성에 대해선 이전 리뷰들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아쉬움이 많습니다. 또, 투입하는 물의 양을 ml단위로 알려주지 않고, 눈금이나 1/3 정도라는 추상적인 수치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 불편했습니다. 에어로프레스의 경우 기구를 거꾸로 두고 추출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렇게 투입하는 물의 양을 눈금에 맞추라고 알려준다면 상당한 차이가 있을겁니다.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추출 가이드에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코스타리카 생두는 향에서도 맡을 수 있을만큼 라이트한 로스팅을 택했습니다. 좋은 생두를 잘 익혀만 준다면, 이정도의 약배전에선 강한 향미를 내뿜을 것입니다. 그라인딩 전에도 원두 패키지엔 향미가 가득합니다.

 

우선 핸드드립 추출을 진행해봅니다. 명확한 로스팅 스타일이 있어 추출 레시피를 정하는 일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드립보다 조금 가는 굵기의 원두를 20g/95도/300ml/2분의 레시피로 추출합니다. 그라인딩 전후로 딸기시럽향이 풍부했던 커피는, 붉은 과일의 단맛을 자랑하며 입안에서도 향을 가득 채웁니다. 전반적으로 체리, 라즈베리, 복숭아, 살구, 오미자에서 느껴지는 복합적인 싱싱한 신맛과 단맛이 매력적인 커피입니다. 살짝 우디한 느낌이 걸릴때도 있지만, 감칠맛이 살아나기도 합니다. 목넘김도 부드럽고 에프터테이스트도 살아납니다. 따뜻할때의 밸런스는 커피가 식어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좋은 생두를 잘 볶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위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생두와 로스팅의 조합을 그대로 느껴보기 위해 에스프로프레소 추출을 시작합니다.

17g/93도/250ml/3분의 레시피를 따릅니다. 100ml의 물을 붓고 저어주는 작업을 통해 약배전 원두의 수율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추출된 커피에선 핸드드립보다 오일리한 바디가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상큼한 복숭아, 붉은 과일의 신맛, 청포도의 단맛이 느껴집니다. 전반적으로 잘 익은 복숭아를 먹는 느낌이 강합니다. 향기롭고 단맛이 많은, 좋은 밸런스를 가진 커피입니다.

 

좋은 커피는 특정한 맛을 도드라지게 나타내는 것보다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그려주는 느낌이 강합니다. 다양한 맛들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죠.

 

코스타리카 브루잉을 통해, FM 커피하우스의 로스팅 성향을 파악해봅니다. 잘 익은 약배전 로스팅의 FM 커피는 물과 커피의 비율만알맞게 조절하고, 수율을 높여주기 위해 잘 저어주기만 한다면 어떻게 내리든 좋은 맛을 낼 것 같습니다.

 

케냐의 핸드드립은 코스타리카와 다르지 않습니다. 20g/93도/300ml/2분의 레시피를 따릅니다. 코스타리카보다 물 온도를 조금 내려보았습니다. 첫 한모금에선 은은한 자몽의 신맛과 단맛이 풍겨옵니다. 오랜만에 커피에서 제대로된 토마토향도 느껴보는군요. 거봉의 달달함은 물론이요 밸런스도 좋습니다. 살짝 칼칼한 목넘김은 아쉽지만, 풍미와 표현력이 좋아 금새 단점이 잊혀집니다. 신맛의 밸런스는 코스타리카보다도 더 좋군요. 포도사탕을 먹는듯한 달달함, 호박엿, 고구마의 매력적인 맛들이 혀를 자극합니다. 

 

조금 애매하게 느껴졌던 에어로프레스 레시피를 따라 커피를 내려봅니다. 17g/93도/270ml/3분10초의 레시피를 따릅니다. 저어주는 방법은 패지키에 적어둔 레시피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핸드드립보다 산미도 살아났고, 개성적인 맛이 살아납니다. 워시드 커피지만 흡사 와인의 맛이 느껴집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포트와인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호박엿과 토마토의 풍미는 역시 강하게 느껴집니다. 개성이 강하고, 밸런스도 좋은 케냐라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줍니다.

 

 

FM 커피하우스의 커피를 브루잉하면서 좋은 커피의 기준을 생각해봅니다. 첫 번째, 좋은 커피는 특정한 맛이 강한 인상을 남기기보다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줍니다. 다양한 맛들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이죠. 두 번째, 어떤 레시피로 내려도 로스터가 제시한 테이스팅 노트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잘 익은 커피에선 떫은 맛과 쓴 맛이 최소화됩니다. 균일하게 익은 원두는 다양한 그라인딩 환경에도 잘 적응하죠. FM 커피 하우스의 원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브루잉하지 않은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셜티 커피의 유입으로 질 좋은 생두를 약하게 볶아 그 풍미와 개성을 살리는 방식이 자리잡았습니다. FM커피하우스의 스페셜티커피 로스팅은 이 부분에서 모범적인 로스팅을 제시하죠. 하지만 이런 로스팅이 '한국 특유의 커피'를 제공할지는 의문입니다. 뉴욕에서도, 런던에서도 맛볼수 있는 커피를 맛보는건 좋은 일이지만, 우리 입맛에 맞는 커피는 어떤건지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겁니다.

 

FM 커피하우스는 저에게 두 가지 대안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전에 방문한 매장에서 마셔보았던 중강배전 싱글오리진 케냐 에스프레소는 스페셜티의 특징을 잘 살려 풍미를 잡아주면서도 강배전의 개성이 강해서 제겐 손꼽히는 에스프레소로 남아있습니다. 구수한 안핌에서 그라인딩된 다크 블랜드도 맛있었구요. 또 하나는 호박엿과 고구마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풍미를 풍기는 생두 선택입니다. 스페셜티커피의 개성을 잘 살리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한 커피를 선별해 스페셜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는 방법은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서울이 아닌 부산에 이런 카페가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 글은 블랙워터이슈(Black Water Issue, http://bwissue.com/)의 블랙빈이슈 코너에서 진행되는 원두리뷰입니다. 해당 링크를 따라가시면, 글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bwissue.com/beaninfo/70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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