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상스&거쉰 피아노 협주곡 -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1993년 실황녹음)

Saint-Saens & Gershwin Piano Concerto, Sviatislav Richter, Christoph Eschenbach, Radio-Sinfonieorchestra Stuttgart des SWR (Concert 1993)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에는 아주 긴 트럼펫 솔로가 나온다. 찬 바람에 근무하던 부대 활주로를 거닐면서 이 곡을 들었는데, 갑자기 가을 날씨가 찾아오니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원래 내가 듣던 곡은 피아니스트 스테파노 볼라니와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의 2011년 음반이다. 계속 같은 연주만 듣는것이 지겨워 새로운 연주를 찾아보는데, 생각보다 음반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녹음은 젊은 연주자들의 것.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거쉰이 이 곡을 만든 때가 1924년이니, 그 후에 수많은 협주곡들이 쏟아졌고 많은 녹음이 있음에도 그의 작곡이 외면당하는건 연주자들의 편견이 작용했을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내가 찾아낸 음반이 있었는데,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가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슈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 1993년에 녹음한 독일 레이블의 연주다. 더불어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5번도 함께 녹음 되었는데, 처음에는 연주자를 잘못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흐테르와 거쉰의 조합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정보를 찾아보니, 이 실황연주는 아주 조악한 음질의 해적반으로 녹음되어 리흐테르를 추종하는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 오고가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약간의 손질을 거쳐 좋은 음질로 복각을 했다니, 일전에 쉽게 구할 수 없는 연주들을 정갈하게 손질해 내놓은 핸슬러 레이블의 연주들이 생각났다. 그러고나선 바로구입, 아무런 일정을 잡아놓지 않은 일요일에 드디어 이 음반을 시디플레이어에 넣을 수 있었다.

 

 

 

몇 장 안되는 속지의 소개글이 좋아 불법으로(?) 번역을하여 옮겨보고자 한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레스, 클라우디오 아라우, 빌헬름 박하우스, 빌헬름 켐프, 아루트르 루빈스타인 - 20세기의 손꼽히는 명연주자들- 공식적으로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거나 심지어 약간의 녹음이라도 남겨두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에 견주어 볼 때,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가 거쉰을 연주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만한 일일 것이다. 슈베칭엔(Schwetzingen)에서 연주회가 있던 날,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선곡해 저녁 공연의 포디엄을 책임졌던 크리스토프 에셴바흐는 리흐테르의 아내와 전화통화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하고 있다. 리흐테르가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슈베칭엔(Schwetzingen)에서 연주하고 싶다며, 자신은 언제나 거쉰의 작품을 높게 평가해왔다는 말을 전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국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좀처럼 거쉰의 곡을 연주할 기회가 없었다며.

 

뒤에 이어지는 내용까지 그대로 옮기자면 조금 길어질것 같아 간단히 요약하자면, 리흐테르의 간단한 프로필과 철의 장막이 무너진 1960년대, 45살이 넘어서야 서방세계로 자유롭게 넘나들수 있었던 그가 미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추측컨데 그에게 자유롭게 리사이틀을 열며 미국을 여행할수 있었던 일은 엄청난 영감을 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거쉰의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다는 마음은 소비에트 시절에 품었다가, 자유로이 여행을 하면서 더욱 커졌을테고 말이다. 그의 나이가 여든이 넘은 1993년, 리흐테르는 드디어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무대위에 올릴수 있게 된다. 좀처럼 무게감 있는 속도로 진행되지만, 연주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깊은 타건을 통한 울림을 들려주고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리흐테르-거쉰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허물어낸다. 일전에 리흐테르 자서전을 읽다가 거쉰에 대한 언급이 있던 것이 생각나 그의 글을 찾아보았는데, 이 곡을 천천히 연주하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역시나 불법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약간의 글을 옮기자면 내용은 이렇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의 생상스 연주와 거쉰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나서의 감상인데, 거쉰이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부분만 옮겨본다. 아마 이 감상을 적은 후애 아내를 통해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작곡가 자신이 피아노를 맡고 있으니 이 연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편곡(누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템포기 지독하게 빠르다. 명인의 기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 요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작곡가 자신의 연주를 듣고 무슨말을 하겠는가"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493p.,브뤼노 몽생종, 이세욱옮김, 정원] 리흐테르의 수첩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번역자료는 1995년에 가서야 끊기는데 이 메모는 그 끝에서 두페이지를 남겨두고 기록되었다. 연주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그는 거쉰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곡가들과 다양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었으며-심지어 서울에서 정명훈의 지휘를 감상하기도 했다!- 메모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80세가 넘은 소비에트연방의 한 피아니스트가 거쉰을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쉽게 그 모습이 그려지질 않았다. 아직도 내 손에 들린 이 음반커버에 리흐테르와 거쉰의 이름은 빙탄지간과 같이 섞이지 않고있다. 그럼에도 연주를 듣다보면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이렇게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연주한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녹음된 생상스 또한 리흐테르의 색이 그대로 묻어있는데, 왠지 보물을 발견한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 볼륨을 한껏 높여 음악을 들었다. 음악도 계절감이 있는지라 찬바람이 불때면 유독 찾게되는 음악들이 있는데 슈베르트와 함께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은 나에게 따뜻한 스웨터와 같은 음악이다. 조금씩 차가워지는 바람에 마음이 헛헛하지만, 얼마전 손에 넣었던 잉그리드헤블러의 슈베르트 연주도 있고 리흐테르가 들려주는 거쉰도 있기에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반은 2010년 헨슬러(hanssler) 레이블에서 제작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8월에 수입되었다. KBS 명연주 명음반에도 소개된적 있는데, 방송은 듣지 않았지만 정만섭씨가 뭐라고 소개했을지 왠지 알것만 같다. 음반의 가격은 온라인에서 18,500원 정도. 리흐테르의 팬이라면, 거쉰을 좋아한다면 망설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