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 타, 한 타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프리카 여행기의 연재가 다시 시작된다. 생업과 학업에 빠져 무책임하게 미뤄두었던 여행기를 다시 무책임하게 이어나가려고 한다. 걱정되는 건, 이전에 써놓았던 여행기들이 맥락없이 이어지지 못할것 같다는 두려움 밖에 없다. 그래도 어쩌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응?)

나이로비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바라본 도심 전경


도심까지 어찌어찌 흘러나온 김에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차가운 도시 남&녀들 답게 나이로비 시내에서 가장 도시적인 스타일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을 들렀고, 큰 마트에 들러 필요한 식료품을 샀다. 저녁에는 매번 우리의 아침과 저녁을 신경써주시는 리라 이모네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공수해온 음식들로 볶음밥을 만들고 한복을 입었다. 잊지못할 2009년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었다.

나이로비 시내는 생각보다 번잡했다. 커다란 건물도 많았고, 바쁜 도시의 모습은 다른 나라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매연만큼이나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과, 수 많은 사람들 때문에 푸르른 케냐의 자연 따위는 쉽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시내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고,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머물던 카하와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건물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화려하고 큰 건물들은 관공서이다. 거기 앞엔 값비싼 외제 승용차들이 세워져있고, 정장을 차려입은 차가운 공무원들이 드나들고 있다.

도심의 건물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화려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전통과 과거를 잊은채, 그저 차갑게 도시를 체워갈 뿐이다. 나이로비도 똑같은 도시에 불과했다.

다만, 위풍당당하게 무단횡단을 할 수 있다는 것 만큼은 정겨웠다. 신호등,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람들도 엄청 많고, 자동차도 엄청 많았다. 우리는 모두 짐가방을 앞으로 들었고, 서로 길을 잃지 않도록 확인했다.

관광객을 위한 건물은 철저하다. 나이로비에서는 훌륭하게 지어진 호텔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준이는 복잡한 도심을 잘도 돌아다닌다. 나도 서울에선, 똑같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심답게 많은 팻말이 살아있었다. 아마도 수 많은 경찰 덕분일 것이다. 대부분의 팻말은 이렇게 유럽의 그것처럼 만들어졌다. 영국의 식민지배 영향이 여지없이 드러난 모습이다.

대형 광고판, 멋들어진 레스토랑,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케냐여행 2주차인 촌놈에게는 아직 익숙치 않은 모습이다.

대부분은 케냐사람이고 간혹 백인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는데, 단 3명의 아시아계 사람과 1명의 한국 사람만을 만났을 뿐이다.

복잡한 도심을 지나 점심 먹을 곳에 도착했다. 나이로비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이다. Sunford 레스토랑이고, fish&chips를 파는 곳이다. 영국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생긴듯 싶다. 지금은 다른 어떤 패스트푸드 음식점보다 나이로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신기하게도 나이로비 시내에는 스타벅스나 맥도날드가 없었다. 아이러닉한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자부심과, 강력한 유럽 문화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잠시 바라본 시내의 모습만 봐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식당은 요렇게 생겼다. 맞은편에 앉은 선미누나를 찍었다. 신기해 하는 표정이다.

오래걸어 둘다 지쳤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1층은 사람이 너무 많아 2층으로 올라왔다. 점심시간을 살짝 빗겨나가 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많았다. 이 식당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음식을 앞에서 주문하면 튀긴 닭과 감자를 받아가는 그런식이다. 사진을 찍는것에 다들 민감한터라 제대로 찍지를 못하였다.

피카나(Picana)라는 케냐만의 음료. 망고 맛 음료수인데 최고 인기있는 음료라고 한다. 그 밖에는 soda라 불리는 콜라나 스프라이트, 진저에이드 등이 있다. 모두 코카콜라의 상품이다. 실제로 거리에 나가면 피카나를 비롯한 소다를 파는 상점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짐작컨데, 케냐에서 소비되는 소다의 양은 실로 엄청날 것이란 생각이다.

아직도 궁금한건, 왜 Fish가 안나오고 Chicken이 나오는 것인가이다. 아무튼,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

번잡한 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나 마트를 찾아나섰다.

케냐의 대표적인 대형 마트 NAKUMATT이다. 우리나라의 그것 처럼 정말 다양한 물건을 판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인도인이 사장이라고 한다. 앞서 이야기 한적이 있지만 영국 식민지배 시절,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을 식민지배의 매개로 사용했다고 한다. 흑인들의 문화가 생소하고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오랜시간 익숙해져있던 인도인들을 아프리카에 이주시켜 일종의 중간계급을 만든것이다. 간편하게 말하자면 집주인이 영국인이라면 집사는 인도인 하인은 케냐인정도 라고 생각하면 될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아무튼 이곳에서 특별한(?) 저녁식사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다.

케냐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들렀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여 비상연락처를 확보하고, 우리의 여행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나름 보안이 철저하게 되어있었고, 한국 여권을 보여주자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케냐에서 한국인을 본다는건 실로 반가운일.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외교관에 대한 일종의 동경따위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대사관 방문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외교관에 대한 동경은 곧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도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

집에오는 길에는 미니버스인 마타투(MATATU)를 이용했다. 나이로비 시내에는 우리나라의 버스터미널처럼 이렇게 나이로비 외곽의 다른 도시들로 이동할 수 있는 마타투들이 한 곳에 모여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마타투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퇴근시간이라 하기에는 아직 일러서 마타투가 많이 여유로웠다. 우리는 빈 마타투를 탈 수 있었고, 가격도 생각보다 싸게 이용할 수 있었다. 케냐여행에서 마타투를 이용하려면 출퇴근 시간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가격도 비쌀뿐더러, 사람도 많아서 억지로 밀어넣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여 러시아워를 피하는 것이 좋다.

효원누나와 준기. 남매사이 같다. 여행에서 의지할 사람은 서로 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부쩍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었다.

마타투로 달린지 20여분, 카하와에 도착했다. 구름은 손에 잡힐 듯 하고, 바람은 머리를 식혀주고, 햇빛은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여행을 했다.

사람이 기분좋은 날씨, 살기 좋은 날씨다. 케냐는 천국이다.

저녁에는 깜짝 송년파티가 있었다. 우리를 위해 애써주신 리라 이모에게 음식 대접을 하였다. 볶음밥과 인스턴트 커피를 대접하고, 우리는 깜짝파티를 위해 변신에 들어갔다.

나랑 선미누나가 한복을 입은 것이다. 아직도 케냐인에게 한국 문화는 익숙치 않다. 케냐사람들에게 동양인이란 중국인 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우리가 시내를 돌아다니면, 몇몇 사람들은 쿵후 흉내를 낸다. 그들에게 아시아 사람이란 곧 중국 사람이고, 중국사람이란 곧 쿵후 유단자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쿵후 유단자가 되어 준이를 보호하는 격(?)이 되었다. 이렇게, 한국이 생소한 리라 이모 가족에게 우리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여주고자 한복을 입었다.

생각보다 리라이모는 더 격렬한(?)반응을 보여주셨다. 너무 예쁘다, 멋있다, 좋다, 고맙다 등등. 그 날은 스와힐리어로 다양한 형용사를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우리 사진기 뿐만이 아니라 리라 이모네 가족의 모든 똑딱이 필름 카메라가 동원되어 사진찍기에 바빴다.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우리도 기분이 좋았다.

준이는 잠시 외출, 삼손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리라이모네 부부와 함께.

한복도 입어보고 싶어 하신듯 했다.

사진을 도대체 몇장이나 찍었는지 모르겠다. 여튼 기분은 좋았다.

진짜 부부같기도 하다. 내가 노안이라 그런가

케냐의 시가지에서 우리가 마주쳤던 모습은 영국 식민지배의 잔상이었다. 도로의 모든 모습이, 음식점이, 문화가 모두 영국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괴념치 않아했다. 오히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케냐 사람들은 영국에게 식민지배를 당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이 영국의 식민지였고 그래서 고급 문화를 배웠고, 영어를 쓸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이 식민지배로 잃은 것 보다, 식민 지배 덕분에 얻은 것들 더 자랑스러워했다. 사실 1년 넘게 아프리카어를 배우고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면서, 식민지배가 아프리카에 남긴 잔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무너진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 천의 자연환경등에 대해 나는 항상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들이 풍요로운 땅에서 풍요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기 보다 일종의 죄책감 따위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식민지배를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안타까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외교관을 만난 것이 그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외교관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케냐에서 그들은, 나를 철저히 실망시켰다. 그들과 짧지만 긴 대화를 나누며(나중에 식사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해 케냐에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스와힐리어를 1년동안 배우고, 이곳을 동경해 무작정 짐을 쌌다는 말에 그들은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고시공부나 하라는 조언을 해줬다. 그리고 나이로비에서 많이 떨어진 케냐산 근처까지 갔다는 말에, 겁도 없다며, 케냐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재차 강조를 해줬다. 자국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외교관으로써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조차 이해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느껴져 부끄러웠다. 그들의 좁은 문화적 이해와 옹졸한 태도에, 경외심은  내 마음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여행을 다니며 준이와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준이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에게 다른나라는 다 위험한 곳"이라고. 한국에 처음 와서 차별받고, 소외당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 이야기가 가슴속에 깊게 다가왔다. 케냐는 타지인인 우리에게 한없이 위험한 곳이었지만, 우리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하고 그들의 삶을, 문화를 거스르지 않으려 할 때 그곳은 우리의 또다른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음을 마음에 세겨둔 날이었다.



다음이야기 : 끝없이 펼처진 파인애플 농장, 그리고 14개의 폭포. 잊지못할 추억을 남겨준 준이네 삼촌과의 하루

2010년 여름, 친구들과 2박 3일간 다녀온 자전거 여행기를 기억을 되살려 올린다.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한건 7월, 휴가나온 오랜친구 정모와 나의 꾐에 이끌려 자전거를 산 준기와 함께  충청도 일주를 떠나기로 계획 했다. 8월초에 휴가를 나온다던 정모가 연락도 없이 휴가가 밀려버려 일주일 가량 계획했던 여행이 2박 3일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게 되어, 들뜬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원래는 대전까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서 그 이후에 옥천, 단양, 영동, 제천등을 돌며 충청도를 일주하는 계획이었으나, 꼬인 일정 덕분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대전까지 접이식 자전거를 가지고 탈 수 있는 KTX로 이동, 대전에서 옥천으로, 옥천 100리길을 둘러 본 후 영동으로, 영동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돌아오는 계획을 세웠다.

여름 여행이라 짐과 장비를 최소화했다. 하지만 꼭 챙겨야 할 것들은 잊지 않고 챙겼다.
 
  • 헬멧과 전후방 라이트 : 가장 기본 용품이다. 야간 주행을 위해 라이트는 건전지를 새것으로 교체해두었다.
  • 자전거 짐받이용 가방(옥션에서 4만원대에 구입), 수건, 초코바 : 여름 여행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타기보다 짐받이로 분산을 하면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들것 같아서였다. 땀을 닦기 위해 수건을 챙기고 여행중 간편하게 속을 채울 수 있는 초코바를 챙겼다.
  • 휴대용 펌프, 펑크패치 : 처음에는 휴대용 펌프와 공구등을 두고갈 계획이었으나 여행에 앞서 근처 자전거 가게에 들러 간단한 정비를 하면서 구입하게 되었다. 자전거 펌프를 안가지고 여행하다가 여행을 망친사람 많이 봤다는 자전거 수리공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상술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행중 몇 번의 펑크와 바람빠짐을 경험하며 펌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 디그리셔와 윤활유, 휴대용 공구 : 여행 코스중에 비포장도로가 포함되어있어 챙겼다. 실제로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 자전거가 말썽을 일으켰다. 다행이도 준비한 공구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했다.
  • 파스와 비상약 : 여행을 가기 전, 준기와 행주산성 등을 다녀오며 미리 연습을 했지만 익숙치 않은 도로에서 장시간 라이딩을 하기 때문에 파스는 필수로 챙겼다.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간단한 비상약을 챙겼다. 여행중, 정모가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고, 비상약으로 간단히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실제로 챙겨간 물건들은 적절하게 사용되었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사진과 함께 간략한 코스설명과 여행기를 써내려가 보려고 한다.


내 민트색 블랙켓 자전거와 정모의 망고색 시보레 자전거. 크기가 작은 미니벨로라 부담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금세 도착. 역에서 대전 지도를 챙긴후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였다. 역을 출발하여 지도를 따라 3시간 정도 달렸다.

큰 고개를 넘는 것이 고비였으나, 그 후에는 별 무리 없이 달렸다. 전날 내린 비로 땅이 젖었고 자전거를 오랜만에 타는 정모가 애를 먹긴했지만 별 문제 없이 우리는 옥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옥천 역사에서 뽀그리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정모는 생각보다 힘들었다고 했다. 간단하게 빗길에 젖은 자전거를 손보고 옥천 지도를 보면서 주변을 탐방 하기로 했다.

금세 날이 어두워졌고, 시내를 한바뀌 둘러보면서 잠을 청할 찾아보았다. 나름 무전여행이 컨셉이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잘 생각도 하고 있었다. 다행이도 잠을 재워주는 곳이 있었다. 지친몸이었지만, 정모와 밤새 추억을 이야기 하였다.

사정이 생겨 중기는 다음날 아침 합류하기로 했다. 정모와 아침일찍 옥천역으로 나섰다.

준기는 역시나 첫차를 놓쳤고, 한참이나 기다린 후에야 우리는 준기를 만날 수 있었다.

여행 둘째 날, 본격적으로 옥천 탐방에 나섰다. 지도를 보고 옥천 100리길을 따라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고, 중간에 영동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금강을 따라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여행의 묘미는 역시 길을 잃는것. 몇번이나 다른길에 들어서야 우리는 원래 계획했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지칠법도 했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쉬어가며 탔던지라 언제나 웃음뿐이었다.

비포장 도로를 택했다. 영동으로 빠져나가는 길이기도 헀지만, 차도 없고, 더 아름다운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풍경은 그대로 강에 비쳐 아름다움은 두 배가 되었다. 중간 중간 싸온 간식을 먹고, 물을 마셔가며 우리는 금강을 달렸다.

정모는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오르막길에서 큰 트럭이 위험하게 운전을 해서 넘어질 뻔 하였고, 내리막길엔 배수로에 빠져 뒹굴었다. 어깨가 조금 까지고 무릎에 무리가 갔다. 헬멧이 없었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하였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정모는 달릴 수 있었다.

뒤에 달린 페니어 가방이 문제였다. 너무 많은 짐을 너어 몇번이나 자전거 바람이 빠지고 펑크가 났다. 셋이서 열심히 씨름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준기는 여행내내 짐승같은 스피드를 자랑했다. 나랑 정모가 한참이나 앞서나가면 천천히 보고있다가 단숨에 따라잡고, 더 멀리 앞서나가곤 했다. 나랑 정모는 짐승이 아니라면 저렇게 자전거를 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갈림길에서 우리는 길을 묻고, 고민에 빠지고, 직감을 믿었다.

어찌어찌 옥천을 벗어나는 길을 찾았다. 잠시 휴식.

금강변을 따라 이동을 하였다. 천천히 걸을 때, 자동차로 빠르게 지나갈 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가슴을 쿵쿵 치지 시작했다. 이래서 자전거 여행을 하나보다.

티 없이 맑았다. 4대강 공사가 걱정되기도 하였다.

비구름이 몰리더니 가랑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비를 피할 요량으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위에서 쳐다보니 영락없는 꼬맹이었다. 비가 그치고 곧 옥천을 벗어났다.

정말로 산(?)을 두 개나 넘고 복숭아를 두 개 얻어먹고, 길을 두 번이나 물어보고 나서야 우리는 영동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늦은 저녁이었고, 우리는 줄을 지어, 신호를 주고받으며 국도를 달렸다.

영동에서는 성당에 머물렀다. 수녀님은 우리에게 오이와 바나나 그리고 콜라를 주셨다. 에어컨이 없는 방이었지만 더위를 느끼지 않고 잘 수 있었다. 우리가 여행중에 얻은 복숭아를 답례로 전하고 아침일찍 영동 구경에 나섰다. 아침은 올갱이 해장국으로 택했다.

아침을 걸게 먹었다. 옥천역에서 지도를 받아 주변을 탐색했다. 기차표를 미리 구입해놓고, 시간에 맞추어 영동을 둘러보는 계획을 세웠다,

갑자기 비가 미친듯이 쏟아져내렸다. 국도 한복판이라 쉴 곳이 없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시 영동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버스역이 보여 중간에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비는 역시나 그치질 않았고, 남은 비를 다 맞으며 영동역에 도착하였다. 비 맞은 자전거를 손보고, 뽀그리를 먹었다. 영동에서 유명한 포도까지 사먹고 나니 비가 그쳤다. 억울하기도 했지만, 언제 그렇게 소나기를 맞으며 신나게 달려볼까 생각을 하니 잊지못할 장면들로 기억되었다. 우리는 피로에 취해, 포도향에 취해 서울로 향했다.


나는 여행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하는 편이다. 그 날의 하늘, 그 곳의 냄새, 함깨 했던 여졍, 우리의 표정, 먹었던 것들, 신세진 것 등등. 이번 자전거 여행은 그 기억이 더 깊이 세겨진 여행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2박 3일동안 서로를 의지하며 달렸고 밤에는 별을 보며 추억을 공유했다. 어둠속에서 달리며 서로를 의지했고, 빗길에서도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가는 곳이 길이 되었고, 여정이 되었다. 머물렀던 곳들이, 함께 했던 순간들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돌아온 겨울 방학, 우리는 강원도로, 남해로 다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그 추억을, 나는 다시 여행기로 남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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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에 트위터에 클로쏘 형님이 글을 올리셨다. 개인적으로 Blur, Oasis보단 Pulp, Suede라고. 나도 찬성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생각 난 김에 집에 있는 먼지쌓인 그 앨범들을 찾아 들었다. 한동안 잊고 지낸 사실이지만, 정말 90년대 말에는 소장가지 100%을 넘나드는 앨범이 많았던 것 같다.

2. 역시 다시 들어봐도 펄프는 우월했다. 앨범의 컨셉이나 멜로디, 곡들간의 조화. 어떤걸 생각해봐도 역시나 펄프였다. John Peel이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Pulp같은 인재들을 데뷔시킨 일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좋은 목소리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좋은 귀를 가지고 좋은 음악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훌륭한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도 훌륭한 음악만큼이나 소중한 일이니까.

3. 2학년 1학기 때, 영미 문화읽기라는 수업을 들었다. 수강생 대부분이 외국에서 오래 살다왔거나 아예 외국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었다. 매 수업마다 100개 이상의 아주 생소한 영단어 블랭크 시험이 있었고, 은근히 경쟁이 있는 발표까지 있는, 교양치곤 매우 고난이도 수업이었다. 신기한건, 나와 몇몇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 수업을 무난하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드디어 나에게도 발표할 때가 찾아왔다. 그 때, 난 pulp의 common people를, 볼륨을 높여, 강의실 전체에 그들의 음악이 울려퍼지도록 틀었다.

 

4. 발표 내용은, 영미 문화읽기에서 배운 영국 사람들의 미묘한 계급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알게모르게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은근히 표면에 드러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나는 당시 펄프의 음악에 심취해있었고, 그들이 영국 밴드라는 점, Different Class라는 앨범에 Common People라는 평범하지 않은 음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 노래의 가사를 대충 찾아보았다. 몇가지 펄프의 사진과 유투브 동영상을 근거로 나는 이 노래는 펄프가 계급의식에 대한 미묘한 풍자를 담은곡이다! 라고 자의적(?)으로 결론을 내렸고 꾸역꾸역 발표준비를 하였다.

5. 나의 생각은,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충격에 빠지거나, 펄프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보는 것이 다음 순서였다. 그리고! 발표가 끝나자 어떤 사람이 손을 드는 것이었다! 토론이 전무한 이 수업에서 누군가 나와 토론을 하고 손을 들다니! 내 발표가, 펄프가, 커몬피플이 그렇게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가!!!!! 라고 생각을 했었다.

6. 그 학생은 손을 들고 내가 "네, 말씀하시죠"라고 말하자 큰소리로 당당하게 나에게 말했다.
 
"저기요, 발표는 좋은데요, 너무 길게 하신거 아닌가요, 그다음이 제 차례인데, 다음사람도 생각해주셔야죠"

커다랗고 두껍게 안경을 쓴 학생이 뒷자리에서 손을들고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즉시 유투브 창을 닫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곤 생각했다. 아! 역시 대중을 사로잡으려면 Oasis를 선택했어야 했던것인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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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 조용히 글을 쓸 시간이 없어졌다.
즐거운 플레이오프를 보면서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눈이 감겨서 깜빡 졸았던 걸 생각하면 이제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쉬지않고 돌아가는 일상 덕분에,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누워버리곤 한다.

의도적으로 벌린거라곤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니
결론적으로는 내가 의도한 것일수도 있다.

복잡한 생각들이 많이 들지만,
아무쪼록 이 많은 일들을 잘 해내고 나면 기분이 많이 좋을 것 같다.
소정의 결과물이 나오는 일들도 있고, 추억속에 오래오래 남을 일들도 있고.
다가올 11월이 기대된다.

두 달간 어머니께서 미국으로 휴가를 다녀오셨다. '어머니가 뭐 사올것 없니?'라고 묻자마자 나는 '에어로프레스하고 케멕스' 라고 답했다. 에어로프레스는 간단하게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기구이고 케멕스는 전통이 있는 오래된 드립 기구이다. 두 제품다 한국에서 사려면 가격이 비싼편이다. 에어로프레스의 경우 미국에서 구입할 경우 25달러(이베이 기준)이고 케멕스의 경우 20-40달러 선에 중고 제품을 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구입할 경우 에어로프레스는 배송료 미 포함 4만 5천원이고 케멕스는 모델에 따라 다르지만 11만원 선에서 구입할 수 있다. 즉, 두 제품다 미국에서 구매할경우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미국에 큰 돈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알고 있고, 두 제품다 부피가 상당하기에 들고다니기에 부담스러운 크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각각 하나씩만을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실제로 케멕스의 크기는 엄청났다. 선물용으로 하나 더 부탁하고 싶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하나 밖에 구입하지 못한게 약간 아쉽기는 하다.).두 제품모두 미국에서 '핫'한 아이템으로 꼽히고 있다. 나도 이러한 뉴 웨이브의 영향에 자극을 받은 지인들로부터 적극 추천을 받아 제품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두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손에 넣었겠다, 오랜만에 커피용품을 사서 신나겠다, 오랜만에 소규모 커피공장 연재를 해보고자 한다. 허접한 사진실력과 커피 추출실력이지만, 아직까지 두 제품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나름 섬세한 리뷰를 해보려고 한다. 케멕스는 필터가 어처구니 없게 배송이 늦게 되는 바람에 미국에서 함께 오질 못했다. 국내에서 필터구입후 케멕스 리뷰도 하고자 한다. 우선 오늘은 에어로프레스의 리뷰이다. 더 궁금하거나 자세한 사진이 필요하다면 말만 해달라. 바로 바로 답변과 사진촬영 들어가겠다!

아름다운 에어로 프레스의 포장이다. 위엄이 흘러 넘친다.

구성품은 다음과 같다. 100장의 필터, 피스톤 그리고 몇몇 소도구들이다. 설명서도 친절하게 잘 적혀있다.

국내에서 구입시 피스톤의 색깔은 파란색인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 직매! 깔끔한 투명색이다!

필터이다. 국내에서 추가 구입시 6천원이다.

설명서는 다음과 같다. 1. 필터와 피스톤을 결합한다. 결합전에 종이필터를 넣는것을 잊지말자. 2. 컵의 입구가 좁은 경우 포함된 깔대기를 이용하자. 3. 투샷 기준으로 동봉된 스푼으로 커피 두 스푼을 넣는다. 4. 80도 가량의 몰을 표시된 선까지 붓는다. 5. 동봉된 젓개로 휘저어준다. 6. 프레스로 눌러주면 에스프레소 등장!

설명서를 고대로 따라하여 필터를 넣어본다.

에스프레소 용으로 잘 볶인 커피를 가늘게 갈아 두 스푼넣어준다.

요로코롬 커피를 넣어주고!

분쇄도는 이정도가 적당할 듯 싶다. 모카포트용 굵기이다.


물이 끓는동안 약불에 우유를 데워준다.

잔도 예열해주는 것을 잊지말자!


물의 온도가 내려갈 때 까지 잠시 기다려주자!

물을 조심스레 부어주고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옆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젓개로 저어준다.

그리고 힘을 주어 눌러주면!

얍!

에스프레소의 등장이다! 원래 신선한 커피로 잘 갈아서 뽑으면 ㅡ레가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오늘 추출의 경우 기간이 조금 지난 커피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크레마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 자체는 맛이 좋았다. 모카포트(브리카)나 머신에서 뽑은 것 보다는 연한 편이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우유를 더하면 라떼가 완성된다.

세척이 간단하다는 건 에어로프레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역시 소문대로 맛과 편의성을 동시에 갖추었다. 약간 묽긴 했지만 아메리카노를 만들거나 베리에이션 커피를 만들기에는 무난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그 자체로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신선한 커피로 추출하여 크레마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더했다. 에어로프레스가 가진 장점은 무엇보다도 편의성이다. 추출이 간단하며 세척또한 간단하다. 머신의 경우 맛은 우수할 수 있으나 가격이 비싸고 유지하기 어렵다. 모카포트의 경우 가격이나 유지면에서는 가정용으로 적합하지만, 여러모로 번거로운 점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에어로프레스의 경우 이 두가지의 단점을 해소시켜주었다. 뿐만 아니라 분쇄 굵기를 좀 더 굵게 하여 추출한다면 물만 좀 더 넣어 드립커피처럼 마실 수 있다. 또한 보온명에 뜨거운 물을 담고 에어로프레스를 챙긴다면, 어디서든지 쉽게 커피를 추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휴대성 또한 뛰어나다고 볼 수 있겠다.

여러가지 면에서 에어로프레소는 그간 가정용으로 나왔단 에스프레소 제품들(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 마이프레시, 프레소, 모카포트)들보다 훨씬 만족도가 높다고 볼 수 있겠다. 맛의 섬세함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쉬움이 남겠지만, 가정에서 커피를 추출하는 일에는 그것만이 중요시 될 수 없다고 본다면 에어로프레소는 최상의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연재가 늦었다. 집에서 매일 놀고 있음에도 연재가 잘 되지 않는것은 천성이다 싶다. 매번 핑계를 대기 귀찮으니 앞으로 성실하게 업데이트를 하겠다는 약속밖에는 할 것이 없겠다. 오늘은 날잡고 여행기를 올리겠다 했는데 방대한 사진의 양으로 말미암아 사진 올리기에 여러번 실패를 했다. 덕분에 2시간에 걸쳐 여행기를 쓰게되었다. 열심히 열심히 만들어 나갈테니, 질문도 많이 해주고 많은걸 느껴가셨음 좋겄다.

지난 이야기 :  물랑가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된 우리들. 순식간에 닭 3마리와 염소 2마리를 잡아먹었다. 신나게 춤을 추고 놀고 시간을 보내고 나서 다시 나이로비로 복귀. 일상(?)을 위해 나이로비의 삶에 적응 들어갔다!

동물의 왕국 케냐에선 모든 국립공원이 잘 되어 있다. 정갈한 입장소와 훌륭한 볼거리들, 천의 자연환경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수많은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그것들을 보게 만든다. 입장료는 평균 6만원에서 10만원 사이.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은 특히, 입장료에 돈을 아끼지 않고 지갑을 연다. 케냐 정부가 부유하고, 케냐가 그럭저럭 나라 구실을 하며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이 국립공원의 역할이 크다.

나이로비는 생각보다 큰 도시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곳은 나이로비에서 차로 약 20분간 떨어져 있는 카하와 웬다니 지역. 매일 아침 사람들은 나이로비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다. 버스건, 마타투이건, 택시건 시내로 나가는건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이 때 만큼은 정찰제가 아닌 대중교통값이 위력을 발휘한다. 아무리 싸게간다 하지만 마타투도 1인당 1천원을 넘게 내야 한다. 케냐에서 여행을 하기 위해선 부지런해야 한다. 출근시간을 피해야하고, 퇴근시간을 피해야 저렴한 가격에 여유롭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나이로비 시내에 도착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와글와글 거린다. 우리가 나이로비를 둘러보기로 한 날에도 사람들은 여지없이 많았고 붐볐다. 그런 나이로비 시내를 걷고 있으면 여느 세련된 도시들을 다니는 느낌이 든다. 케냐도, 엄청난 발전을 하며 도시화를 이뤄나가고 있기에, 도시의 모습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바쁘고 화려하다. 이번과 다음편에 걸쳐 나는 나이로비와 나이로비 주변의 국립공원과 소도시들을 여행한 기록을 적어보려한다.

출근길은 언제나 붐비고 사람이 많다. 버스들도 그렇고, 마타투도 그렇다. 우리는 붐비는 아침, 마타투를 타고 준이가 다니는 교회로 마실을 나갔다.

교회는 붐비는 시장통을 지나서 있었다. 비가 오고 난 터라 바닥에 웅덩이가 많았다. 날씨는 여전히 선선하고,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였다.

역시나 교회는 소박했다. 시멘트 벽에 뚫린 십자가 하나와 의자들 그리고 단상 하나만 조촐하게 놓여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에 모여 춤을추고 노래하고 예배를 했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교회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정말로, 흑인들의 교회에서는 랩으로 찬양을 했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교회 구경하는것도 나쁜일은 아니었다. 90%가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인 케냐에서 교회문화를 체험하는 것도 일종의 여행이었다.

시장에선 맛있는 것들을 많이 팔았다. 망고, 바나나, 오렌지, 각종 채소들과 옥수수, 사탕수수 등. 우리는 예배가 끝난 후, 초대된 집에 가기 전에 시장과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선물을 샀다. 그 와중에는 이렇게 아무곳에서나 사진을 찍었다.

준이의 친구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해서 찾아갔다. 역시 나이로비에서 조금 떨어진 집이었다. 조그마한 신혼 냄새를 풍기는 집이었다. 그곳에서는 애기가 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선미누나는 아이가 둘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도 선미누나 품에 안기자 곤히 잠들어버렸다.

멀리서 여행온 우리를 위해 집주인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주셨다. 이건 일종의 뎅구(콩요리)이다.

식탁에는 언제나 자파티나 우갈리가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식탁에 밥과 김치가 빠지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자파티와 함께 먹는 스튜이다. 주로 염소고기가 들어간다. 보기와는 다르게 매콤하지는 않다. 케냐에선 뎅구 아니면 스튜가 우리나라의 국 처럼 자주 식탁에 오른다.

닭요리였다. 국물이 좀 없는것만 빼면 우리나라의 안동찜닭과 비슷했다. 케냐의 닭은 운동을 많이해서 질기지만 씹는 맛이 좋았다. 우리나라의 닭과는 다르게 살이 없는 편이지만 닭을 일부러 살찌우기 위해 약을 먹이고 가두어 키우는 것 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살집이 없어도 맛있으면 그만이니까.

은도마(ndoma)라는 고구마의 친척뻘 되는 녀석이다. 감자와 함께 스튜형식으로 나왔다. 저번편을 잘 살펴보면 쪄먹는 은도마가 등장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은도마는 이렇게 스튜에도 들어가고 그냥 먹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감자 고구마처럼 활용이 많이 되는 음식이었다. 맛은 역시나 감자와 고구마의 중간이었다.

우리는 스와힐리어로 각자 소개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준이의 동생도 이 자리에 함깨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타투 잡기가 힘들었다. 6명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때문에 모두가 교회를 가고 하는 그런 시간에는 빈자리가 많은 마타투를 잡기가 힘들다.

다음날, 우리는 나이로비 시내 구경에 나섰다. 본격적인 나이로비 시내 구경에 앞서, 시내 바로 옆에 있는 국립공원을 찾기로 했다.

나이로비 시내에서 차로 5분정도 가면 나이로비 국립공원이 보인다. 입구는 저렇게 생겼다. 안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차(마타투)를 타고 돌아다니는 코스가 있기도 하고 정해진 길을 따라서 공원을 산책하는 사파리워크라는 코스가 있었다. 차를 빌리는 것도 힘들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에 우리는 사파리 워크를 선택했다.

국립공원은 언제나 정갈했다. 케냐의 주된 수입원은 주로 이런 관광자원이기 때문에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사실, 사회 보장시설이나 기반 시설보다 이렇게 국립공원에 들어가는 돈이 더 많다는걸 생각해보면 아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해서는 정부의 노력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케냐를 둘러보다 보면 정부의 노력은 온통 국립공원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케냐의 아쉬운 단면이었다.

보통의 길거리에선 보기 드문 간판(길거리의 간판은 보통 돈이 되기에 설치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뽑혀버린다고 한다.)과 정갈하게 다져진 길들이 인상적이다.

촬영장비를 들고있는 나의 모습. 사파리 워크에 들어가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2년전에 미국에서 동물원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의 동물원과 별반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냐 국립공원의 요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외국인의 경우 US달러로 표시되어있다. 사파리워크는 20달러로 그나마 국립공원 치고는 싼 편이었다(코스가 짧기 떄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거주자들(주로 동아프리카 사람들을 의미한다. 케냐는 브룬디, 르완다, 탄자니아 등과 함께 동아프리카 공동체를 출범시키려고 수년째 노력중이다. EU를 모델 삼아 동아프리카의 강력한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리고는 케냐사람들 혹은 나이로비 사람들이다. KSH는 케냐 실링인데 70실링이 약 1000원정도 하므로 100실링은 1천 5백원, 300실링은 4천원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외국인이 20달라(약 2만 4천원)인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다.

다다다다다음편에서 살펴볼 거대한 국립공원에 비하면 철조망도 쳐저있고 동물들도 비활동적이지만, 나름 인공물을 많이 배제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공기도 좋고, 훌륭한 자연환경도 좋았다.

케냐에서는 참 멋있는 나무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국립공원(나쿠루 국립공원, 응고로응고로 국립공원)에서는 치타나 사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더러 사냥은 주로 초저녁이나 새벽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원에서는 치타나 사자가 가시권에 들어온다. 나름 매력있는 부분이다.

철조망이 쳐있긴 하지만 나름 자유롭다. 한국에서는 보기힘든 동물들이 많다.

이런식으로 이어진 나무 길을 따라서 주욱 걷다보면 많은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모두 기분이 좋아졌다. 이곳은 조용하고 볼거리도 많고 정갈했는데, 그래서인지 많은 커플들이 보였다. 실제로 이곳은 대학생들이나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나도 신혼여행을 케냐로 오게 된다면 이곳에 다시 들르고 싶다.

공원은 이렇게 넓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맘에드는 곳에 머물다보면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무에는 이렇게 새들이 있거나 새집이 있었다.

각자 눈을 크게 뜨고 동물들을 찾아 헤맸다.

하늘은 넓고, 가깝고, 맑았다.

이곳에서도 운이 좋으면 동물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찾는게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이렇게!

이곳은 아마 기린 먹이를 주는 곳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동물원을 찾은것은 낮시간때였다. 덕분에 사자들은 저 멀리서 뒹글거리고 있었다. 동물들은 대부분 해가 중천에 떠 있을때 활동을 하지 않는다.

뒹굴뒹굴, 저러니 하나도 안무서웠다.

가서 배라도 긁어주고 싶었다.

옆에서 코뿔소는 나름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간혹 이렇게 설명을 적어놓은 팻말들이 있었다. 영어와 스와힐리어로 쓰여져있는데, 덕분에 스와힐리어 공부도 조금 했다.

하마는 지쳐있다 하암.

케냐에서 이정도면 참새둥지정도 되겠다.

사파리 워크를 끝내고 사진을 찍었다. 유쾌한 하루였다!

겉으로 보기에 케냐와 탄자니아는 민주정부의 형태를 띄고 있다. 하지만 케냐는 키쿠유 부족(케냐의 최대 부족) 독점과 부정부패로, 탄자니아는 수십년동안 이어진 일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 나라 다 선거를 하지만 케냐의 경우 정전을 일으켜서라도 투표결과를 조작하여(실제로 2008년에는 선거 결과 발표 도중, 키쿠유 부족 출신의 유력한 당선 후보가 큰 표차로 뒤지자 정부는 3시간의 정전을 단행했다. 정전 후에는 선거 결과가 뒤집혀 있었고, 지금의 케냐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다. 이 결과로 케냐에서는 소요사태가 발생했고 수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한 총리가 민간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선되었고, 탄자니아에서는 투표가 이뤄지긴 하지만 언제나 같은 당의 후보가 당선되기 때문에 언제나 경쟁은 당내에서만 이뤄진다고 한다.

케냐의 국립공원의 입장료는 일종의 국가 수익사업이었다. 매년 수천만명의 외국인들이 동물을 보러 케냐와 탄자니아에 왔다 가는걸 생각하면 입장료로 얻어지는 수익은 엄청날 것이다. 국립공원을 돌아보면서 케냐나 탄자니의 정부가 이 수익으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입장료의 절반이라도 국민들을 위해 투자했다면 지금의 케냐, 탄자니아는 훨씬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쓴 돈들이 케냐 정부의 주머니만 두둑하게 채워진다 생각하니 꺼림찍함이 가시질 않았다.

다음편 예고 : 옆집 리라 이모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그리고 한복 파티! 그리고 여유롭게 나이로비를 활보하며 케냐의 도시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공개한다!

개구장이 친구들은 디카가 신기한가보다. 사진을 찍고나선 바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을을 떠날 때 즈음에는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기사가 우산같은걸 들고왔다. 우산에서 불이 번쩍! 아직 여긴 클래식 카메라가 대세다!

지난 이야기 : 준이의 농장을 탐험했다. 말그대로 숲속을, 자연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따먹으면서 말이다. 그리곤 준이와 물랑가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케냐의 자연을 경험하였다.

계절학기를 끝내고 집에오는 길은 지치고 힘들었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약간의 환기증을 느끼다가 나는 케냐를 생각했다. 아직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고, 빗물을 받아쓰는 그곳이 생각났다. 그 곳에서는 아스팔트 도로보다 흙으로 된 도로가 더 많았다. 비가오면 질퍽질퍽 발에 들러붙곤 했지만, 오히려 시원했다. 땅은 열을 머금지 않았고 적당히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가 더 많았고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연과 함께 살고 있었다. 사실, 불편을 감수한다기보다 그냥 자연과 함께 사는 것이고 그것이 그들에게 더 편한 삶이었다.

농장에서 돌아오고 몇 일간은 숙소에서 쉬기도 하고 준이와 주변을 돌아보기도 했다. 이동을 할 때는 주로 걸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걷고, 이야기하고 걸었다. 그리고 집에와선 한 바가지의 물로 얼샤워를 하고 몸을 식혔다. 해가 지면 움직일 수 없었기에 집에 모여 다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당장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여유롭게 걸었다. 물랑가의 하루였다.

바나나가 울창한 숲에서 선미누나가 서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천천히 걷고 숨을 쉬었다.

준이네 앞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저 멀리 케냐산이 보일 것 같다.

수잔은 준이의 동생이다. 준이만큼, 공부를 잘하기에 꿈도 많고 똑똑하다. 항상 우리에게 살갑게 대해주고 많은 것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덕분에 물랑가에서의 날들이 좋았던 것 같다.

준이네 집은 일종의 이장댁 같은 곳이었다. 동네 꼬맹이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준이네 집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놀다가 가곤 했다.

'바나나 먹고 싶어?','네' 아뿔싸, 준이어머니는 여기있단다. 이거 다 우리꺼라고 천천히 먹으란다.

준이네 삼촌과 할머니. 같이 앉아 있으면서 스와힐리어로 몇마디 나누었다. 1년간 배운 것들이 아쉽지 않을 만큼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참 행복해 보인다. 아이들은 줄곧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우리도 같이 춤을 추고 노래 했다. 어릴땐, 이렇게 자라야 하나 싶다.

물이 부족해 머리를 잘 감지 못할 때도 있었다. 혹은 물 한 바가지로 샤워를 했기 때문에 머리가 잘 안감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바나나는 맛이다!

아. 정말 최고다. 향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다시 한 번 케냐를 간다면 가자마자 바나나를 사먹을 것이다!

쩌~~ 멀리 코코넛이 보이는가!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열매를 맺었다.

아름답고 이름 모를 꽃들이 참 많았다. 초점이 나가긴 했지만 이 꽃을 찍은게 하나 뿐이라 올리고 싶다.

새집인 것 같다.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길 고양이었다. 사람이 와도 도망가지 않았고 우리를 졸졸 쫓아다녔다.

에헴

준기도 에헴!

전선이 보이긴 하는데, 전력 상황이 그다지 좋진 않다. 정전도 자주되고. 사실 전기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은 동네이긴 하다.

시간이 나서 근처 커피농장에 들렀다.

아직은 수확을 하는 계절이 아니라 텅텅 비어있었다. 커피를 재배하는 계절이 오면 이곳은 커피를 씻고 정제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커피체리를 벗겨내는 곳이라 설명을 들었다.

껍지를 벗겨낸 커피들이 이곳에서 말려진다. 케냐 커피는 신맛이 강하게 나며 고구마 맛이 나기도 하는(개인적인 의견) 맛있는 커피이다.

역시, 재배를 안하기에 조용하다.

불량 커피들이 모여있다. 체리가 잘 벗겨지지 않은 놈들이나 정제가 제대로 안된 놈들을 모아둔 곳인 것 같다.

껍질이 아직도 붙어있는 걸 보니, 불량품들이 맞나보다.

케냐의 큰 태양으로 맛있는 커피가 만들어진다.

파치먼트 생두라고, 실버스킨이 벗겨지지 않은 생두들이다. 요놈들을 고대로 심으면 커피나무가 자란다!

커피 체리들이다. 커피는 아주 엄선된 지역에서만 자란다. 고도, 위도, 강수량, 온도 등 여러가지 조건들이 갖춰진 곳에서만 잘 자랄 수 있다. 케냐의 천의 자연환경은 질좋은 커피를 만들어 낸다.

붉게 익은 체리들이 재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준이는 농장을 도는 내내, 커피의 가공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따. 더불어 케냐커피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집에 도착해선 우갈리를 먹었다. 우갈리는 우리나라의 밥 처럼, 프랑스의 빵 처럼 케냐인의 주식이다. 거친 옥수수 가루를 끓는 물에 집어 넣고 계속해서 뒤집고 저어주면 우리나라의 백설기 같은 것이 나온다.

준이의 동생들은 뜨거운 우갈리를 손으로 주물럭 주물럭 거리며 우리의 먹을 것을 만들어주었다.

정성이 들어간 우갈리다. 맛은 약간 싱거운 백설기 정도? 정말 밥을 먹는 기분이다.

호박과 당근등을 넣고 우갈리와 함께 먹을 스튜를 끓여주셨다. 우리는 저녁을 걸게 먹었다.

이름이 기억 안나지만, 준이의 동생이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뻣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에는 우갈리양.

이 케냐 깡시골에도 코카콜라는 음료를 팔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소다(탄산음료)를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좋았지만, 한 편으론 이곳까지 트럭을 몰고와 콜라를 파는 놈들이 약간 미워졌다.

동네의 쇼핑센터. 이곳에서 소다도 사고 필요한 것들을 산다.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난 어딜가든 시장이 좋다. 시장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물건을 판다. 대형 마트에서는 냉장고와 얼굴을 마주보거나 시식코너와 마주보곤 한다. 에잇, 그러니 내 말은 가능하면, 시장도 자주 가라는 얘기다.

이렇게 얼굴이 마주치면 나는 웃으며 잠보! 하바리 야코!(Jambo!, Habari yako!- 안녕하세요 어떠세요?!) 라고 인사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웃으며 은주리 사나-아산테!(Njuri sana- asante!-잘 지내요, 고마워요!)라고 대답한다.

여기 피는 이 꽃들이 신기했던지, 효원누나는 떠나는 길, 서점에서 케냐 식물도감을 사갔다. 우리가 만난 꽃들 중 몇 종류를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신기하다. 곳곳이 이런 꽃 투성이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케냐에선 꽃 구경으로 2일동안 종일 걸어다니는 일정을 잡아야 한다!

환하게 웃는 쥬디.

삼손도 일을 마치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집을 찾았다.

자파티를 만드는 과정이다. 반죽을 빈대떡 처럼 밀대로 밀어 크게 만든 후에, 후라이팬 같은 곳에 올려 기름을 쳐가며 빙빙 돌린다. 앞 뒤로 열 번 넘게 돌리고 나면 맛있는 자파티가 완성된다.

직접 해봤는데 쉽지 않다, 빙글빙글 돌려가며 타지 않게 해야 하는데 어렵고 뜨겁다!

방금 만든 자파티는 신기하게 달고 맛있었다. 식은 자파티는 스튜하고 먹으면 그만이고. 정말 좋은 음식읻

다음날 새벽,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염소를 잡았다. 염소 잡는 장면은 좀 잔인하니 선택권을 주겠다. 보고싶은 분만 아래를 클릭!

삼손은 자파티 만드는 것을 도우고 있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모여 이날 파티를 위해 자파티를 만들었다.

아주머니들은 우리가 촬영을 하고 있자 이리와서 같이 하자며 웃으셨다. 곧 나는 저 자리에 앉아 자파티를 만들었다!

갓 만든 자파티를 얻어 먹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축제 기분이 났다!

한 쪽에선 방금 잡은 염소를 물 한방울 없이 가죽을 벗겨내고 있었다. 대단한 손놀임이었다. 가죽은 악기를 만들고, 옷을 만들고, 가구를 만드는데 쓰일 것이다.

케냐에는 아랍지역 문화가 남아있어 터번을 쓴 사람도 꽤 있었다. 98%의 기독교인을 제외한 인구중 대대수가 이슬람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종교는 중요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에도, 이들은 다같이 모여 염소고기를 먹고, 자파티를 먹고 춤추고 노래를 한다.

손질된 염소 다리이다. 이곳 고기들은 우리가 먹는 고기와는 달리 동물성 사료를 먹이지 않고 가두어 키우지도 않는다. 따라서 근육이 잘 발달되어있고, 상당히 질기며 씹히는 맛이 좋다. 가공된 고기의 맛보다는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질긴 것이 단점이긴 했지만, 코코넛 가루를 넣어 이를 해결할 수 있어서 그닥 문제가되진 않다. 이어진 내장 손질 장면은 비위가 약하신 분들을 위해 다시 선택권을 주겠다.



이 사진 이후로는 우리도 같이 자파티를 만들고 구경하고 하느라 사진을 찍지 못했다.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찍기도 그렇고 말이다. 이후에는 맛있게 준비한 음식들을 먹고 신나게 춤추고 노래했다.

파티는 간단하다. 이렇게 힘들게 만든 음식을 나눠먹고, 기도하고, 춤을 추고 노래한다. 노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투오나네~ 투오나네  파라디소(Tuonane~ Tuonane~ Tuonane Paradiso- 또 봐요~ 또 봐요~ 또 봐요 천국에서!)

어르신들이 선창하면 우리가 답례로 따라부르고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 몇이 다시 선창을 하고 나머지가 따라부른다. 신나게 흔들고 춤추고 가사를 바꿔 부르고 놀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후에는 소다를 나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춤추고 노래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극진히 VIP대접을 받았다. 부담스럽기도 했고, 너무나도 고마웠다. 새로운 손님들이 왔다며 더욱 흥겨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우리도 모든 것을 잊고, 체면치레 생각하지 않고 신나게 흔들었다! 투오나네! 투오나네! 투오나네 파라디소!!!

다음편 예고 - 드디어 나이로비에 다시 입성! 나이로비 국립공원 및 시내투어를 시작한다. 파인애플 농장도 들린다, 그곳에선 파인애플 한개가 단돈 천 원! 너무 달아서 파인애플 심까지도 씹어먹는다. 보고싶다고? 그럼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편을 기대하시길!!

이제는 정기적인 업데이트가 되지 않을까 하네요. 그간 업뎃에 불만을 가지셨다면 이제 그런 걱정은 유에스비에 넣어놓고 다니셔도 되게씁니다(무슨말인지;). 사진을 정리하면서 감동받고 즐거운건 오히려 제 자신인 것 같네요. 오랜 여행을 정리하고 그 추억들을 되돌아보면서 잠시 그때의 기분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다른 여행도 그랬지만, 케냐 여행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 말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여행을 가신다면 전 당당히 케냐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케냐는 아릅답고 평화롭고 좋은 곳이기 때문이죠. 단비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낙후된 지역을 찾아가 봉사도 하고 우물도 파주는 그런 프로그램이더군요.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에 '진짜 케냐'는 보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케냐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조금은 색다르게 다가온다면 그건 문화의 차이고 생각의 차이일 뿐이지 그들이 잘 살거나 못사는 것의 차이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비'에 비친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면 조금 씁슬한 마음이 듭니다. 그들이 물부족에 시달리고 가난한 이유는 단지 그들이 우물을 팔 만큼의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들이 우둔하고 발전되지 못해서 그런것도 아닙니다. 풍요로운 땅 케냐에서 그들은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찾아온 식민주의에 따른 자본주의와 무분별한 자원개발, 지구 온난화가 그들의 먹을 물을 빼앗고 그들이 살 터전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건 하나의 우물이 아니라 그들이 원래 그들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정무역을 찾는 일,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작은 행동을 하는 것,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일 말입니다. 제 사진이, 제 여행기가 케냐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잘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긴 이야기는 여행기를 쓰는 동안 천천히 말하고자 합니다. 아직은 더 긴 여정이 남았으니까요. 오늘은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그럼 물랑가로 떠나볼까요 ^^?

완벽한 가이드 준이. 우리는 졸졸 그 뒤를 따라 다닙니다. 칙칙- 폭폭-


지난 이야기 : 우여곡절 끝에 물랑가에 도착, 닭잡아 먹고 편히 쉬면서 인생의 참맛을 느낌

물랑가에 도착해서 준이는 톡톡히 가이드의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첩첩산중 속에서 준이의 가이딩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길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케냐의 자연은 정말 많은 것을 품고 있었습니다. 훼손되지 않은 그 풍요로움 속에서 우리는 유쾌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농장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준이는 이건 뭐고 저건 뭐고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먹을 것이라면 들고 있는 칼로 단숨에 잘라서 우리에게 나눠 주었다.

사탕수수를 자르고 있는 준이.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재료이다. 슈가케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준이의 고향인 물랑가에는 많은 사탕수수를 볼 수 있었는데, 많은 이들의 간식거리가 된다고 한다.

먹는 법은 간단하다. 칼로 사탕수수를 자른다음 껍질을 벗겨낸다. 개미들을 털어내고 먹기 좋게 조각내어 오물오물 씹으면 된다. 너무 달기 때문에 항상 개미가 있다. 농약따위는 사용하지 않고 자연에서 자랐기 때문에 씻을 필요는 전혀 없다.

능숙하게 사탕수수를 손질하는 준이. 저렇게 자르고 남은 사탕수수를 땅에 꽂아 놓으면 일주일 후에 무럭무럭 자라난 사탕수수를 만날 수 있다. 지력이 뛰어나고 기후가 좋기 때문에 어떤 작물이든 무럭무럭 자란다.

사탕수수를 다시 심는 이야기를 하면서 망고 먹다가 씨를 뱉으면 망고 나무가 자라나고 사탕수수 먹고 심어놓으면 쑥쑥 크니 평생 여기서 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정말 풍요로운 케냐였다.

손질한 사탕수수. 이걸 오물오물 씹고있으면 설탕물이 나온다. 그 어떤 사탕이나 껌 보다도 달고 맛있으며 그 맛도 오래 갔다. 정말 하늘에서 내려준 간식인듯 싶다.

준이의 사촌이었는데 이름을 까먹었다. 우리 뒤를 쫒아다니며 각종 위험요소를 제거해주었으며 우리가 놓치는 간식들이 있으면 금세 따다가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방 모든 것이 먹을 것 천지였다.

이렇게 줄을 지어 케냐산 주변을 산책했다. 모두가 신났다.

준이가 칼을 들고 있으니 코끼리가 튀어나와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다들 즐거운 여행을 했다.

준기와 효원누나. 준기는 케냐에서 별명이 키준기였다. 키준기는 스와힐리어에서 ki/vi 클래스에 속하는 단어이며(스와힐리어에는 8개의 단어군이 있다) 차를 내릴때 차를 거르는 거름망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모두가 준기의 이름을 말하면 즐거워했다. 맙소사 거름망이 이름이라니!!!

비가 오고 난 후라 그런지 공기가 더욱 맑았다. 우리가 물랑가에 갈때마다 매일매일 짧고 굵은 소나기가 내렸다. 준이에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규칙적이고 예상할 수 있는 비가 내렸지만, 요즘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매일매일 불규칙하게 소나기가 쏟아진다고 했다. 이러한 환경변화로 농작물을 관리하는데도 애로사항이 생긴다고 했다.

준이네 농장이다. 망고도 있고 커피도 있고 사탕수수도 있다.

다시 칙칙- 폭폭-

망고나무가 지천이다. 여기 망고는 정말 맛있다. 아직 익지 않은 망고지만 너무 탐스러웠다. 날씨가 너무 좋아 딱히 망고를 수확하는 계절이 없다. 어떤 망고나무는 탐스럽게 익은 망고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나무는 저렇게 설익은 망고들이 주렁주렁 수확을 기다리며 자라나고 있었다.

망고 크기의 500배에 달하는 효원누나의 얼굴 감상을 해보자.

자라나고 있는 작물들인데 뭔지는 기억 안난다. 이것까지 필기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저기 뭔가 주렁주렁 달린것이 망고나무다. 에헴. 망고 먹고싶다. 얼마전에 마트에 갔는데 조그마한 애플망고 2개에 8천원이었다. 케냐에선 1개에 300원도 안되는데 폭리다 싶었다.

심하게 썡얼이신 문기누나가 준이네 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열심히 작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준이.

케냐에 가서 부쩍 얼굴이 탄 내 모습이다.

바나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여기 바나나는 정말 쓴 맛이 하나 없이 달고 씹는 맛이 일품이다!!

케냐에는 아직 동양인이 드물다. 게다가 이 동네에는 동양인의 방문이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를 처음본 준이의 이웃들은 우리가 모두 중국인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중국인의 이미지란 쿵후를 잘하는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다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준이의 이웃들이 "뭐하러 칼을 들고다니냐 준아, 저기 중국인들이 쿵후로 널 지켜줄텐데!" 그렇다. 우리는 모두 쿵후 유단자다. 아뵤!!

물랑가에도 마타투가 다니긴 했지만 우리는 주로 걸어서 이동을 했다. 끊임 없이 이어지는 저 길을 신나게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면 내가 하늘 위를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가끔'든다.

준이네 엄마는 줄곧 우리를 마중하셨고 배웅해주셨다. 그리고 그 곁에는 준이네 친척들이 있었다. 우리 모두 친구였고 노래를 불렀다. 임바임바 임바 임바~(노래 노래 노래 노래 노래~~- 스와힐리여 동시통역!)

망고를 먹고난 후의 선미누나의 표정이다. 아, 아닌가?

준이의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스와힐리어로 냐냐(Nyanya)이다. 우리가 시카무- 냐냐(안녕하세요 할머니) 그러면 할머니는 우리에게 마라하바(시카무(높임말로 인사할 때 쓰는 말)의 답변)라고 답하며 웃어주셨다.

준이네 집에서 효워누나의 떨떠름한 표정

애교가 많은 준이의 동생 수잔이다. 우리가 사탕을 준다고 하면 어김없이 케냐 최고의 댄서로 변했다.

준이네 엄마가 바나나 먹을래? 라고 물어봐서 네~ 했더니바로 옆에 있는 바나나 나무에서 저걸 따다 주셨다. 다 먹는데 무려 2일이나 걸렸다.

바나나 따주신다길레 한 사람에 한두개나 주시려니 했는데 저렇게 통째로 주셔서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저건,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맛이다!

우리가 바나나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신 냐냐다.

설탕 듬뿍 차이다. 차를 방금 갓 짠 우유와 섞어 오래 끓인 후 키준기(!)로 걸러내고 설탕을 듬뿍 넣어 저어 마시면 된다. 언제나 우리는 차를 대접받았다.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우리는 여행객이 아니었고, 현지인과 함께 춤을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었다. 융성한 대접에 너무 감사했고,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우리의 저질 스와힐리어를 들어주셨다.

다음 편 예고 : 드디어 크리스마스 파티다! 아침 일찍 염소를 잡고 신나게 춤을 추며 파티를 했다! 케냐에서의 광란의 파티는 어떨지 궁금하지 않은가?

얼마만의 업데이트인지 모르겠다. 만약에, 혹시나, 혹여나, 조금이라도 내 여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또, 여행을 다녀온지 6개월이 지났는데 어떻게 다 기억을 해내냐 하고 따지고 물으신다면 나는 원래 메뉴얼 적인 사람이라서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늦게 올린건 귀차니즘 때문이다. 삶이 고달프다 요즘.

천의 자연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란 애벌레. 이게 진짜 애벌레인가 보다. 애비!



지난 이야기 - 우여곡절 끝에 케냐 나이로비에 도착. 한 민간인 아파트(?) 혹은 현지인 아파트에 머물며 지역 주민들과 화합의 장을 이룸.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준이의 도착을 기념해 공원에서 한바탕 댄스 파티를 벌임.

준이는 케냐에 도착하자마자 고향으로 향했다. 2년간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고향이기에 그럴법도 했다. 우리도 그 일정에 맞춰 준이를 따라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나이로비에서 북서쪽으로 100km(정확히는 모르겠다)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물랑가라는 곳이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근처 카후히아에 있다. 이곳은 케냐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 케냐산을 끼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서늘한 기후를 자랑한다. 우리가 머물렀던 물랑가는 해발 3000~4000미터 정도이고 근처의 산들은 대부분 4000미터를 훌쩍 넘는다. 케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5,199미터이다. 이 지역은 케냐 최대 부족인 키쿠유부족의 발원지이다. 준이 또한 키쿠유족이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계획하고 있었고(키쿠유 부족들과 함께), 잠시 나이로비로 가서 관광을 하다 다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는 일정을 잡았다. 마타투로 1시간정도 실컷 달리면 갈 수 있는 거리라 그렇게 부담가는 일정은 아니었다.

우리 숙소 근처다. 케냐에는 횡단보도가 없다. 사실, 횡단보도라는 개념이 없다. 길을 건널땐 무리 중 한 사람이 외친다. 원 투 쓰리! 그리고 크로싱!!! 시내에는 줄이 몇개 그어져있는데, 그것만이 이곳에 횡단보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을 말해준다.

저기 멀리 보이는 저게 마타투이다. 언제나 마타투는 손에 잡힐듯한 구름 속과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속을 달린다.

케냐는 정전이 잘된다. 아직은 인프라가 구축이 안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생각엔 독재의 영향도 조금은 있는 듯 하다. 케냐의 정치 상황에 대해선 다음번에 좀 더 자세히 서술해드리겠다.

사람들은 저렇게 산다. 넓디넓은 평원에 집을 지어놓고 여유로이 거닐며 지낸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예사로 보면 안된다. 저래뵈도 기본 3000미터는 넘는다.

길 중간 중간 거주지와 시장들이 있다. 없는 건 없고, 있을 건 다 있다. 정말, 다 있다.

길은 대체로 아름답다. 포장이 어설프게 되어있어 시트가 꺼진 마타투를 타면 엉덩이가 타버릴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찌만 언제나 창 밖을 보면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차가 많이 몰리는 곳엔 항상 이렇게 망고 장수들이 줄을 잇는다. 자기네 농장에서 지은 망고를 이렇게 나와 파는 것이다. 우리는 마트에서 사기보다 주로 이런 곳을 통해 싸고 질좋은 애플망고를 구입했다.

맛있긴 한데, 이렇게 무턱대로 들이대면 좀 곤란하다.

케냐에서 간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간판을 이루는 철들은 돈이 되기 때문에, 걸리는 즉시 뽑히기 때문이다. 뭐 우리나라도 간판 뽑아가는건 낮선일이 아니긴 하겠지만 말이다.

뭘 찍었는진 모르겠는데, 꽃이 이쁜 것 같다.

드디어 오랜 시간 끝에 물랑가 도착! 바나나 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 드넓은 평원을 보라!

우리가 묵었던 곳은 카후히하 여자 고등학교이다. 기숙학교이며 나름 명문고등학교라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방학중이라 이 곳 선생님의 숙소 중 한 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 준이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써 주셨다.

교정이 참 아름다웠다. 아침이면 이곳을 산책하곤 했다.

이름도 모를 꽃들이 엄청 아름답게 피어있다. 맘에들면 앞마당에 뽑아다 심으면 또 이렇게 울쑥불쑥 자라난다.

카후히아 여고 정문이다. 밤이면 준이네 가족들이 다 같이 우리를 여기로 배웅해주었다.

동네 꼬맹이다.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한다. 잠보! 하바리야코! 그러면 친구는 대답한다. 잠보! 은주리 사나!

준이는 이 동네에서 꽤 유명하다. 10걸음 마다 한번씩 아는 사람을 만난다. 그 때마다 준이는 우리를 자랑스럽게 소개해주었다.

밤이면 우리는 달빛에 의존해 길을 걷는다.

오랜 여정에 다들 지쳤다. 여긴 준이의 방이다.

귀한 닭이다. 우리를 위해서 준이네 가족은 2번이나 닭 요리를 해 주었다. 양배추를 토마토와 볶은 반찬과 감자가 들어간 댕구(혹은 뎅구)랑 같이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여기 닭은 말 그대로 풀어놓고 키우기 때문에 근육이 장난 아니다. 덕분에 닭고기도 약간 질기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꽃이 인사한다. 안녕!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준이가 다녔던 교회에 가보기로 했다. 날은 대부분 이렇게 화창하고, 온도는 15도 정도로 선선하다. 하루에 한 번 정도 비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걸어다니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하쿠나 마타타!

사진 그만찍고 언넝 따라오란다.

앞에서도 말했었지만, 케냐 인구중 98%가 기독교인이다.(아마 식민지배의 영향이 있는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시골에도 교회는 있었다. 잠시 들러 구경해보기로 했다.

다들 사진 찍기에 바쁘다.

고개를 돌려서!, 언제나 식물들은 우리를 기쁘게 했다.

장난감 같은데 진짜다. 진짜로 이렇게 이쁘다.

동화 속에 나오는 교회같다. 교회는 저래뵈도 단촐하다. 들어가면 의자와 선반 하나밖에 없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큰 건물도 필요없고, 화려한 인테리어도 필요없다. 자연속에 어색하지 않으며 소박하면 그만이다.

교회에서 바라본 물랑가 전경이다. 손에 잡힐듯한 구름과 바나나 나무들이 너무 그립다.

5초간 감상

교회 사람들과 함께 찍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손님들을 반긴다. 여기서는 키쿠유 부족의 발원지 답게 키쿠유 어로 인사해야 한다. 키쿠유어로 어른들께 인사할 때는 웨무에가 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누에가 모노모노모노 라고 답할 것이다.웨무에가는 하우어유 누에가는 지낸다 모노모노모노는 너무너무너무다. 모노를 많이 할 수록 사람들은 크게 웃는다.

의자와 조촐한 선반만이 교회의 재산이다.

아, 분 밖을 보면 보이는 풍경도 물론 교회의 일부이다.

할머니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며 일일이 웨무에가라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모두 누에가 모노모노모노라고 답했다. 모두가 잘 살고 있다.

구름속에 있었다. 언제나 우리는,

교회에 대해 준이가 설명했는데 까먹었다. 꽤 오래된 교회라고 한다.

어디서나 찍기만 하면 아름다운 풍경이 잡힌다.

우리는 항상 여유로웠고, 한가했다.

교회의 마당이다. 별 꾸민것도 없지만 꽃이 아름답고 나무가 좋다.

다시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흔히 보이는 꽃인데, 효원누나 말에 의하면 덴버껌 냄새가 난다고 했다. 향은 정말 기가 막히게 좋았다.

에, 이쁘다.

간식으로 준이가 프렌치 토스트를 해 주었다. 빵이건 계란이건 다 귀한 음식들이다.

뎅구다. 이건 저녁으로 먹은거다. 항상 댕구와 밥을 먹으면 언제나 든든하다.

준이네 밭이 저기 어딘가에 있다.

밭 기행은 다음 편에 보도록 하자.

이 녀석들은 크리스마스 파티에 잡힐 것이다.

물랑가는 아름다운 곳이다. 공기가 맑고 차도 맛있고 커피도 쑥쑥 잘 자라는 천의 환경이다. 가령, 망고를 먹다가 그 큰 씨를 던져놓으면 그게 망고나무로 자라는 시스템이랄까. 하지만 차는 영국 자본의 것이며 커피는 미국 자본의 것이다. 앞으로의 여행기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얘기해볼까 한다.

우리는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파티를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다음편 예고 - 준이네 농장투어! 그리고 물랑가 탐방이 이어집니다-!

커피 발전소는 '정말로' 발전소 앞에 있다.
당인리 화력발전소 또는 서울 화력 발전소 앞에 위치한 조그마한 카페다. 화력발전소 하니 이거 뭐, 지방에 있는 카페야?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수역, 합정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조금 오래 걷는다 싶을 수도 있지만, 근처에 의외로 카페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아서 그렇게만은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전거가 가장 최상의 이동수단인것 같긴 하다. 이 카페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있으니까 말이다. 잔잔한 음악이 계속해서 흐르고, 향기로운 커피가 일품이다.

간판은 고작 저거 하나다. 사실, 자전거 타고서 조금 헤맸다. 나름 인간 네비게이션이라고, 약도 하나 외워두고 출발했는데. 헤매다니!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많은 책들. 나도 카페를 열 때 즈음엔, 이정도 책장은 3개정도 메울 수 있는 책을 모을 수 있겠지?

책을 두고 왔더라도 맘 놓고 볼 수 있는 책들이 많다.

오픈된 공간을 싫어하는 사람을 위하여 조그마한 방도 준비해놨다.

카페 전경. 조금 흔들렸다. 편하게 않을 수 있는 곳이 많아서 좋다. 쉬고싶을때 오고싶은 곳이다.

생각보다 테이크 아웃 손님이 많았다. 분주하게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된장질을 해댔다.

역시 진리는 동 드립 포트인가. 먼저 온 손님이 많아 오래 기다렸더니 땀이 다 식었다. 덕분에 아이스 커피를 괜히 시켰따는 생각을 했다. 담엔 꼭 따뜻한 커피를 시키리라!

한 잔에 4천원. 맛있고, 착한 가격이다.

더치 커피 가격을 내려야 겠다. 여기서도 5천원에 파는데 말이다. 좀 더 싸게,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비싼 더치 툴은 50만원을 훌쩍 넘는다. 역시 진리는 과학 도구다. 사장님이 손수 만드신듯한 더치툴.

홀의 모습. 깔끔하다.

곰다방에도 있는 설탕통. 에. 그러고보니 더치툴에, 설탕통, 원두가격과 더치 가격이 전부 곰다방하고 일치한다.

전등은 커피 자루로 만들었다. 중고 시디도 판다.

매뉴판. 호가든이 좀 뜬금없어 보이긴 한다.

나오면서 찍었다. 커피 발전소 옆에 있는 진짜 발전소.

  • 커피발전소 포인트 - 신선하고 맛있는 드립커피, 저렴한 커피가격과 더욱 저렴한 테이크아웃 커피가격. 조용한 실내와 여러권의 책은 시끄럽지 않은, 책 읽을만한 카페를 찾는이에게 최적의 장소.
  • 커피발전소 미스포인트 - 인상깊지 않은 에스프레소메뉴. 드립커피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랄까.
  • 커피발전소 포 미 - 자전거 애호가인 나에게는 반가운 곳. 맛있는 드립커피와 조용한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는 플러스요인!
  • 커피발전소 가는 길 - 지하철로 갈 때에는 상수역 4번출구 내려서 한강공원 방면으로 직진 후 사거리서 우회전. 쭉 가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화력 발전소가 보인다. 조금 더 직진하면 좌측에 커피발전소가 있다.
    버스는 마포07번이 다니고 있다. 근처에 정류장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자전거 이용시에는 홍대에서 주차장길 지나서 쭉 따라 내려와서 골목길을 조금만 지나면 발전소에 다다를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댓글을 달아주시면 되겠다.
    연중 무휴, 영업시간은 이른 10시부터 늦은 10시까지.
    자전거 주차가능, 음료는 착한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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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는 사람이 참 살기 좋은 곳이다. 연간 15~20도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으며 조금 더워졌다 싶을 때면 시원한 소나기가 내려 지열을 식혀준다. 이 지역은 평균 2000m을 넘나들기 때문에 습하지가 않다. 바람도 매우 시원한편이며 땅도 비옥하다. 가히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안도 생각보다 어지럽지 않았다. 모두들 우리가 케냐에 떠날 때 걱정하는 것이 치안이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나 외국인은 위험한 법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케냐에 와서 잠시 우리 여행에 합류했던 한 한국인 소녀는 두바이 경유를 할 때 잠시 두바이 택시를 탔다가 납치를 당할 뻔 했다. 준이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택시기사들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길을 도통 모르니 그들이 가는 곳을 그대로 따라 가야 했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유학생은 어처구니 없는 택시비를 내야만 했다. 어딜가나 외국인은 차별받고 사기꾼의 속임의 대상이다.

케냐에서의 날들은 생각보다 편안하고 안전했다. 우리가 빌린 아파트는 2달 임대료가 15만원이다(5명이 부담했으니 한달 사용료가 개인당 1만 5천원이다). 준이의 도움 덕분에 우리는 부담스런 숙식비를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 아파트의 사람들은 너무 친절했다. 할 일이 없는 날이면 아파트에서 나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외국인도 두명 살았는데 한 사람은 중국인이었고 한 사람은 케냐인과 결혼한 유럽사람이었다.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했다.

준이를 마중하러 나가기 전 준이의 친구들이 모였다. 자카리아는 준이의 오랜 친구다. 지금은 케냐산 근처 카후히아에서 경찰로 일하고 있다. 멋있고 힘도 센 든든한 친구다.

사실 아파트에서 불편한 건 층간 소음이었다. 다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으니 낮에는 조용할 리 없었다. 그 밖에는 좋았다. 근처에 많은 상점과 마트가 있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게다가 양변기도 있고 온수도 나왔다!!

우리는 아랫층 사설택시를 운행하시는 아저씨에게 준이를 마중나갈 때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보통 이곳의 주된 교통수단은 마타투(미니버스)이지만 외국인에게는 택시가 제일 편하다. 하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므로 이를 고려하고 타야한다.

아랫층에 사는 꼬마다. 우리가 시끄럽게 굴어서 나와본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출발을 기다리며 아이와 놀았다.

준이 동생과 효원누나도 같이 아이와 놀면서 사진을 찍었다.

낮가림이 심했다. 엄마 아빠 품이 아니면 다른 곳에 있기를 꺼려했다. 효원누나가 안으려고 하자 울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발. 한 대는 택시, 한 대는 준이네 삼촌 차를 이용했다. 준이내 삼촌 차를 탄 나는 거리에서 파는 바나나를 시식할 기회를 얻었다. 바나나는 씁슬함이 전혀 없었고 달달하며 씹는 맛도 있었다!! 너무 맛있었다.

준이 삼촌의 큰 딸, 왐보위다. 너무너무 귀엽고 사람도 잘 따른다. 준이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우리는 이러고 놀았다. 사실, 이 사진도 겨우겨우 찍은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공항에서는 촬영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금지라기보다도 외국인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공항에는 준이를 맞이하기 위해 일가 친척이 다 모였다. 어림잡아 50명도 넘는 듯 했다. 준이는 나이로비 대학에 진학한 인재이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고 한국에 유학한, 집안에서는 가장 엘리트이다. 모두가 준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모두들 준이를 반갑게 맞았다.

가족 모두 갈 곳을 찾다가 우리는 한 국립공원에 들렀다.

한적한 공원에 앉아 우리는 춤을 추었고, 이야기를 나눴고, 바나나와 은도마를 먹었으며, 사진도 찍었다.

공원은 한적하고 좋았다.

이게 은도마(ndoma)다. 우리나라의 감자와 고구마 사이의 맛이다. 그닥 맛있지는 않았지만 배를 채우기에는 괜찮은 음식이었다. 이렇게 쪄서 먹기도 하며 스튜에 넣어서 먹기도 하는, 많은 음식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식재료였다.

준이 이모, 준이 어머니, 준이 삼촌이다.

준이의 또다른 삼촌들

준이의 할아버지와 삼촌이다.

준이 할머니와 효원누나 그리고 레이첼(준이의 여동생)

준이의 어머니다.

다 같이 모여 신나게 춤을 추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근처에 한국인 선교사 분도 있어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외지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반가웠다.

이렇게 모여서 우리는 함께 tuonane(스와힐리어로 다시 만나요) paradiso(스와힐리어로 천국), 즉,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껏 흥을 올렸다. 모두가 공원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배가 나와 보인건, 은도마를 혼자 5개나 먹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사진찍기를 좋아해서 우리들 곁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며 졸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집에 왔을 땐, 옆집 레아 이모가 우리를 위해 만찬을 준비했다. 양고기가 들어간 스튜와 자파티(스와힐리 전통 음식)이었다.

자파티는 인도의 '난'과 유사하다.혹자는 그 이유가 식민지 시절 유입된 인도인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밀가루 반죽에 약간의 간을 해서 자파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만든 자파티는 너무 맛있었다. 여기에서는 우갈리(옥수수 가루로 만든 음식)와 함께 모든 음식에 함께 나오는(일종의 밥과 같은) 음식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뎅구라 불리는 음식인데, 우리나라의 된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콩으로 스튜를 만든 형식인데, 굉장히 고소하고 맛있었다. 사실, 고기가 식탁에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저 뎅구와 자파티만을 먹는데, 이것만 먹어도 너무너무 맛있다. 특히 소화도 잘 된다.

먹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스튜에 뎅구를 섞고, 자파티를 찍어 먹으면 된다. 정말, 정말! 맛있다!!!

후식으로는 파파야를 먹었다. 생각보다는 밍밍한 맛이었다.

레아 이모에게 고마웠던 우리는 마트에서 산 망고를 가져왔다. 그 맛이 일품이었다. 애플 망고는 정말 맛있다. 사과의 신 맛이 없고 망고의 느끼함이 없는 훌륭한 맛이다. 배가 불러도 다들 망고는 4-5조각 씩 먹었다.

애플 망고는 요로코롬 생겼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을 대비하여 햇발을 많이 사왔다. 라면도 사오고 말이다. 밖에서 매번 밥을 사먹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었고, 매번 얻어먹기도 미안했기에 이런식으로 우리는 끼니를 때우고자 했다.

준이가 도착하고 여행이 활기를 찾았다. 이제 우리는 준이네 고향으로 가려고 한다. 케냐 산 근처에 키쿠유 부족의 발원지이다. 케냐는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데 그 중 최고 많은 부족이 키쿠유(인구의 약 25%)다. 해발 4000m정도 되는 지역에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곳으로 떠나기 전, 우리는 하룻 동안 긴 비행시간동안 소비했던 체력을 보충하고, 동네를 거닐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인천에서 나이로비까지
인천공항에서느 케냐 직항 비행기가 없다. 대부분의 케냐행은 방콕을 거치거나 두바이를 거쳐가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두바이를 경유하는 쪽이 비행기표가 싸다. 하지만 늦게 비행기표를 예매하는 경우 자리가 없다. 우리는 뒤늦게 케냐행을 결정했기 때문에 방콕 경유를 택해야만 했다. 비행기표는 대략 122만원 정도였다. 방콕까지는 6시간 방콕에서 케냐는 10시간 정도가 걸린다. 저렴한 노선을 택하려면 미리미리 예매를 해야 한다. 두바이까지의 비행기는 많지만 두바이에서 케냐를 향하는 비행기는 매진인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사진과 함께하자.

장기간의 비행기 여행은 언제나 지치기 마련이다. 장기간 여행에 대비해 짐을 엄청나게 많이 가져갔기 때문에 공항에서 여러모로 분주하고 힘들었다. 약 3시간 정도를 짐하고 씨름하니 비행기 안에서는 다들 곤히 잘 수 밖에 없었다.

방콕 공항에서는 미쳐 짐에 넣지 못한 것들을 구입했다. 한 달치 선크림, 목욕용품들을 적당히 사고 나이로비로 향했다. 방콕에서는 아프리카행 비행기가 꽤 많은편이었다.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잇는 다양한 노선들이 있었고, 동남아시아는 물론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이 공항에 노선이 있었다. 자연스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이 공항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 킬리만자로(5,895m)다. 비행기 안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걸 보면 정말 높은 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로비 공항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었다. 어느 공항이나 촬영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만 나이로비 국제공항은 더 심했다. 주변 국가인 수단, 소마리아에서 내전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특이한 행동을 해도 검문을 받게된다. 뿐만 아니라 타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강하여(경찰이나, 국가기관의 경우가 심한 것 같다) 외국인의 행동하나하나에 예민하다. 나도 촬영을 하다 경찰들에게 잡혀갔었다. 다행이 별 일은 없었지만 오금이 저릴뻔한 기억이었다.

적도라 햇볕은 강하지만 이래뵈도 온도는 시원하다. 수도 나이로비의 경우 해발 2500m정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보기와는 달리 연중 15도 정도를 유지하는 편이다. 사람살기에 너무나도 좋은 곳이다.

동아프리카 지역을 스와힐리 문화권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오래 전 부터 중동지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의식주 곳곳에서 중동적인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건물은 이런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삼손. 우리 준이의 동생이다. 비행기 일정이 맞지 않아 우리가 준이보다 먼저 도착 했는데, 삼손은 그런 우리가 안전하게 숙소에 도착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남은 여행에서도 우리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준이의 어머니. 우리에게 맛있는 차이를 끓여주셨다.

지쳐보이지만 밝은 문기누나

나도 긴 비행시간에 머리도 떡이지고 몸도 지쳤다. 하지만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과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난간에서 바라본 나이로비 전경. 우리가 머무른 곳은 나이로비에서 차로 20분 거리의 카하와 웬다니라는 지역이었다. 주로 경찰들이 사는 곳이다. 여기서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정말 케냐에 왔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가져온 안내문을 자세히 읽고 있는 최준기 군.

물론 나도 읽었다. 동물의 왕국 케냐에 대한 내용이었다.

가족 사진을 보여주는 삼손

케냐는 영국식민지였다. 덕분에 대부분의 케냐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는 편이다. 그외에 동아프리카의 교통어인 스와힐리어를 쓴다.

삼손이 우리를 위해 직접 만들어준 마카로니. 염소고기가 들어가있다. 케냐의 경우 다른 고기보다 염소고기를 많이 먹는 편이다.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외국에 나가면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수인성 질병이다. 케냐의 경우 A형간염, 장티푸스등이 물을 통해 전염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린 물을 먹지 못했고 목이 메어 조금씩 남기게 되었다.

마카로니와 함께 나온 사모사라는 스와힐리문화권의 전통 만두. 향이 독특하고 속이 부드럽다. 하나만 먹어도 든든한 맛있는 음식이다.

후식으로 오렌지를 먹었다. 케냐는 동물의 왕국이기도 하지만 과일의 왕국이기도 하다. 풍부한 강수량과 햇빛, 비옥한 토양덕분에 과일 무럭무럭 자란다. 한국에서는 맛볼 수없는 풍부한 향미가 그득한 맛이었다.

밥먹고 근처 마켓으로. 집 근처에 핀 꽃

영국 식민지였던 케냐에서는 인도인을 많이 볼 수 있다. 식민통치의 편리함을 위해 영국은 많은 인도인들을 케냐로 데려왔다. 덕분에 식민지에서 벗어난지 반 세기가 지났어도 케냐는 인도의 영향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나쿠마트도 인도의 브랜드다. 우리나라의 대형마트 정도로 왠만한 동네에는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과일은 시장보다 비싸다. 현지인에게도 나쿠마트는 이용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격이 센 편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팔지 않는 물이라든지 필요한 식료품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나쿠마트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마트가 비싸다 해도 과일은 한국보다 훨씬 싸다. 망고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시장에서는 천원(70케냐실링정도)에 3개, 마트에서는 천원이 안되는 가격(약 60실링정도)으로 1개 를 살 수 있다.

삼손은 우리를 위해 정성스래 애플망고를 골라주었다.

제기랄 놈의 코카콜라는 케냐도 잠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과일들. 우리나라보다 훨씬 싸고 맛있다.

간단히 장을 보고 우리는 근처 교회를 찾았다. 삼손이 다니는 교회다.

케냐는 약 90%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못지 않게 교회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이렇게 슬레이트로 지어놨거나 건물에 있더라도 화려하지 않았따. 들어가면 의자 여러개와 탁자 하나정도 있다. 우리나라의 교회처럼 번뜩이거나 화려한 장식도 없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건물에, 모여 앉을 수 있는 의자만 있으며 그곳은 교회가 되었다.

저녁에는 불빛이 많이 없어 조용하고 은은했다. 달빛과 별빛이 사라이 만든 빛보다 더 밝았다.

저녁으론 옆집 레아 아줌마가 만들어준 스튜를 먹었다. 이것도 역시 염소고기었다. 저녁을 걸게 먹었다.

망고는 정말 맛있었다. 케냐는 망고의 나라다. 이곳의 애플망고는 사과의 시큼함이 없고, 망고의 느끼함이 없는 훌륭한 과일이었다. 맛있는 저녁에 훌륭한 후식을 먹으니 든든했다. 케냐에서의 첫날 밤은 든든했다.

다음날 아침도 역시 레아네집에서 먹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웃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때때로 불러서 식사를 만들어주었다.

빵도 고소하고 쫀득쫀득 했다.

오후에 도착할 준이을 맞이하러 가기 전 교회에 들러서 간단하게 예배를 보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 쉽게 빠질 수 없었다. 교회는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사람들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루밖에 안지났지만 우리동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옆 아파트였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잘 살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준이의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동네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걱정을 많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사람들은 모두 우리에게 친절했고, 우리들도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지 못할 것 같았던 아프리카에 도착을 했고, 사람들이 오손도손 사는 그곳에, 우리도 살게 되었다. 우리가 살게된 곳 나이로비 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카하와 웬다니 지역이었고 아파트 이름은 GIGATT(God is good all the time)이었다. 2달 임대료는 15만원. 이웃들은 친절했다.


장물의 시대는 지났다.
중고로 구입한 망고는 장물이었다. 덕분에 경찰서에 다녀왔고, 자전거를 압수 당했다.
중고는 더 이상 안되겠다 싶아서 민트색 블랙캣 콤팩트를 구입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니 자전거를 가져가라고 했다. 민트캣이 도착하는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두 녀석을 다 들이게 되었다. 망고는 아저씨가 타기로 했다. 민트캣은 작고, 조용하면서도 튼튼하고, 잘 나간다. 게다가 접히는 녀석이라 어디든지 들고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제 민트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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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방송을 한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로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특히나 나의 경우는 양우만 알고 갔으니 더욱 그랬다) 지금은 서로 많이 친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토요일 만나 방송을 준비하고, 생방송을 진행하고, 술자리를 가지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학때는 다들 시간이 넉넉하야 일주일에 3-4번 만나곤 했다. 자주 얼굴을 보고, 방송 아이템을 얘기하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를 하는 존재가 되었다(적어도 나는 그렇다). 

요즘 너는 뭐하고 지내니, 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나? 라디오 하면서 지내지' 할 정도로 라디오 방송은 나의 일상에 큰 부분이 되었다. 20대를 위로하고자,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 보고자 시작한 라디오 방송에서 가장 많이 위로받고, 웃고있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항상 고마웠기에 그리고 같이 있어 행복했기에 라디오 친구들에게 멋진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마침, 3월 말에 돼지와 너구리의 생일이 연달아 있어 그 주 방송날에 케익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할 줄 아는게 브라우니라 머릿 속으로 브라우니를 멋진 케익으로 변신 시키는 방법에 대해 강구하고 있었다. 결전의 날은 다가왔고, 생방송을 무려 6시간 앞두고 케익 만들기에 돌입했다.

생각보다 브라우니 케익의 레시피는 간단하다. 특히나 집에 '쿠* 압력 밥솥'이 있다면 말이다. 지금 부터 밥솥 브라우니 케잌 만들기에 대한 간단한 메뉴얼을 소개하겠다.

재료 : 박력분 120g, 베이킹 파우더, 초콜릿200g(150g은 브라우니에, 50g은 브라우니 위를 장식할 때 쓰임), 버터 100g, 계란 3개, 우유 150ml, 코코아 가루 40g, 아몬드, 슈가파우더


맛있는 브라우니의 생명은 정확한 계량이다. 모든 재료들을 제시한 분량에 맞게 계량을 해둔다.

분량의 초콜렛을 중탕하거자 전자렌지를 이용해 적당히 녹인다. 이어 상온에 놔둔 버터를 조금씩 덜어가며 섞어준다.

역시 상온에 놓았던 계란 3개를 하나씩 넣고 풀어주고를 반복한다. 계란이 너무 차가운 경우 반죽이 잘 되지 않으므로 조심하자.

우유 150ml 정도를 반죽에 넣고 잘 저어준다. 130ml정도를 먼저 넣고 나중에 모든 반죽이 완료된 후에 조금 퍽퍽하다 싶으면 남은 우유를 넣어주는 것도 좋다.

다음으로 박력분, 코코아가루, 베이킹 파우더를 체에 처 순서대로 천천히 넣어준다.

완성된 반죽을 밥솥에 옮긴다. 옮기기 전, 밥솥에 버터를 발라주는 것을 잊지 말자. 쿠* 압력밥솥이라면 만능 찜기능을 이용하자.50분 정도 찜을 해주면 브라우니가 완성된다.

완성된 브라우니 위에 중탕한 초콜렛을 뿌려주고 굳기 전에 아몬드를 적당히 뿌려준다. 준비해놓은 슈가파우더도 뿌려주면서 적절한 데코를 해준다. 이후 냉장고에서 열을 식혀준다.

딸기를 이용해 적절한 데코를 해도 이쁘다. 알맞은 크기로 컷팅을 해서 즐겁게 먹으면 끝!!


생각보다 맛있어서 나도 놀랐다. 이전에 브라우니를 만들때에는 일반 초콜릿을 썼었는데 다크 초콜렛을 구입해 썼더니 여러모로 브라우니가 맛있었다. 다들 맛있게 먹어줘서 너무 고마웠고, 생일케익을 고르는 수고를 덜어서 좋았다. 다음번에는 다른 토핑을 이용해 케이크를 꾸며보고 싶단 생각도 했다. 그리고 생일을 맞은 너구리와 돼지가 잊지 못할 생일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20대, “386세대! 지갑 열고 입 닫아”

[130호] 2010년 03월 16일 (화) 16:39:13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대가 제일 듣기 싫은 말 가운데 하나가 ‘88만원 세대’란다.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면서 붙기 시작한 ‘G세대’니 ‘88둥이’도 정작 20대는 시큰둥한 표정이다. 386세대가 익숙했던 잣대로 88만원 세대니, G세대니, N세대니 따위로 자신들을 규정짓는다며 20대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규정 당하기를 거부한 20대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려대 김예슬씨 자퇴 선언에 이어 20대 노조인 청년유니온이 결성됐고, ‘마포는 대학’ 이나 ‘율면은 대학’ 등 돈에 구애 받지 않는 행복 직업 찾기도 시작됐다. 

도대체 20대 넌 누구냐? 20대 기자가 20대 다양한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주말 저녁 6시. 주파수 100.7MHz에 맞추면 20대 DJ 다섯 명의 ‘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프로그램 이름은 무시무시하게도 ‘이빨을 드러낸 20대(이드2).’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DJ 평균 나이는 23.2세, “지금 20대에게 필요한 건 ‘깡’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프로그램 이름도 이렇게 지어봤단다. 지난해 11월21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이제 4개월 차에 접어든 이드2는 ‘20대에, 20대를 위한, 20대의 방송’을 표방한다.

이드2를 만든 건 시원한 맥주 한 잔 때문이었다. 지난해 10월 어느 날, 서울 마포구 지역공동체 라디오 마포FM 자원 활동가를 하던 너구리(방송 애칭·본명 조소나·25), 양큐(김양우·22), 늘보(김지애·24)는 맥주잔을 기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취업 얘기에 한 숨 한 번, 군대 얘기에 또 한숨을 내쉬었다. 

   
마포FM에서 '이빨을 드러낸 20대(이드2)'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20대 DJ
누군가 우석훈의 책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얘기를 꺼냈고, 자리는 갑자기 “레알(진짜) 뭔가 한 번 해봐!”라며 들떴다. 셋은 “우리끼리 우리를 위한, 우리의 답답함을 담아 낼 수 있는 방송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친구인 돼지(유기림·23), 쩌리쪼(조원진·21)까지 불러들여 다섯 명으로 제작팀을 꾸렸고, 공동체 라디오 마포FM에 프로그램을 제안해 방송 허락을 받았다.

이드2는 20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20대를 위한 ‘우정과 환대’의 공간으로, 또 다양한 20대 활동가들에게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되도록 많은 20대를 스튜디오로 불러들인다. 20대 저널리스트의 모임 ‘고함20’, 영화 <개청춘>을 제작한 영상집단 ‘반이다’ 등 20대 활동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20대들을 직접 스튜디오로 불렀다. 

지난 3월13일 방송에서는 고려대 김예슬씨가 붙인 자퇴 대자보를 놓고 DJ 5명이 “우리에게 대학은 뭘까”를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철학과를 간다고 울던 엄마 생각에 눈시울 붉히던 조원진씨, “대학생이 아닌 동생을 남들이 뭐하냐고 물으면 ‘학생’이라고 대답한다”라며 눈물 한 방울 보태던 김지애씨 등 모두 답도 없고 무기력해 하던 중 유기림씨가 “자퇴하지 않은, 할 수 없는 우리는 뭘 할거냐, 그래서 우리는 ‘이드2’를 하지요”라고 말했다. 일동 웃음이 터졌다.

패기만만하게 시작한 이드2가 정말 20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지 물어보자, 김지애씨는 “20대가 얼마나 다양한가. 많은 20대가 있는데 누구에 초점을 맞춰야 하나. 우리도 대학생이라는 한계가 있고, 만나기 어려운 20대가 있다. 그래서 못하는 얘기가 있다는 게 우리의 한계다”라고 말했다. 

   
일주일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와 곧 다가올 졸업, 군 입대는 20대들에게‘뚫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들에게 라디오 방송이 20대를 억압하는 세상에 ‘하이킥’을 날릴 수 있는 활력소라면, 일주일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와 곧 다가올 졸업, 군 입대는 ‘뚫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도 이들은 과외, 번역 등 닥치는 대로 ‘알바’를 뛰면서도 세상에 이빨을 드러내고 이가는 소리를 계속 내고 싶어 했다. 

20대 세대론에 대해서도 묻자, 이드2는 ‘88만원 세대’라는 20대에게 부여된 필연적인 이름마저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G세대’니, ‘V세대’니 언론이 조명하는 20대의 모습도, 이들에겐 어른들이 ‘하명’한 이름일 뿐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조소나씨는 “20대에게 이름을 붙이려는 것 자체가 옛날 사고방식인 것 같다. 그냥 우리는 다양하고 산발적이다. 그 와중에 네트워크가 생기는 거다. 그런 네트워크들이 이를테면 EU(유럽연합)처럼 묶이는 방식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세대’이름으로 묶는 건 속한 개개인을 불행하게 하거나 소외시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유기림씨 역시 “왜 이렇게 규정짓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라며 웃었다. 
김지애씨는 단칼에 20대론을 벴다. “386세대!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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