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G; 김선욱, 서울시향, 정명훈,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교향곡 5번'운명'

Deutche Grammophon; 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Symphony No.5

Sunwook Kim(Piano),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Myung-Whun Chung, 2013.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따라 마음껏 변하는 선율을 이해하는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과 비슷하다. 로스터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음색을 만들어가듯 생두를 고르고 콩을 볶는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단계들을 거처 우리는 한 곡의 심포니와 같은 커피 한 잔을 마주한다.

 

처음 커피를 마실때는, 언제쯤 다양한 커피들을 제대로 느끼고 구분해낼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건 책으로 읽어서 되는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설명으로 이해되는 일도 아니었다. 좋아해서 마시고, 그렇게 자주 커피 한 잔과 마주하다보니 이제는 커피를 조금은 이해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로스터도 생기고 바리스타도 생겼다. 음악을 듣는일도 비슷하게 된것같다. 처음엔 어려웠던 선율들이 이제는 마음에 와 닿는다. 지휘자의 손 끝에서 파도가 출렁이듯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보는 일도 익숙해졌다. 좋아하는 지휘자가 생기고 오케스트라가 생겼다.

 

지난 1월, 요섭형과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베토벤연주회에 다녀왔다. 말러와 모차르트를 통해 친숙해진 서울시향을 만나는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합창석, 관악파트의 깊은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자리는 고작 3만원이었다. 소리의 밸런스를 느끼기엔 부족한 자리었지만 정명훈의 섬세한 표정을 살피며 연주를 볼 수 있는건 더할나위 없는 좋은 선택이었다. 피아노의 소리가 아쉬운 협주곡 5번이 끝나고 오케스트라가 전열을 정비하자 감동의 소리가 밀려왔다. 3-4악장의 흥분되는 피날레를 맞이하면서 나와 요섭형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3만원에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호사라고 그랬던 형의 말이 맞았다.

 

우리가 봤던 공연이 음반을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음반이 나오면 꼭 같이 새로 연 카페에서 듣자는 약속을 했었다. 음반이 카페에 도착한 날 아침은 운이 좋게도 내가 비번을 받은 날이었다. 눈앞에서 포장을 뜯고 연주를 들었다. 새로바뀐 헬카페의 스피커는, 잘 정재된 디지털 음원과 어울려 좋은 소리를 냈다. 공연에서 느낄 수 없었던 김선욱의 섬세한 연주는 카페를 가득 채웠다. 필요한 소리만이 존재하는 협주곡이었다. 정명훈이 맥주를 마시며 연주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3악장은 흥겨웠다. 화려하면서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김선욱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서울시향과 가진 인터뷰서 김선욱이 존 엘리엇 가디너와 베토벤 4번 협주곡을 함께한 것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매우 흥미로웠다. 절제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선욱의 베토벤 연주는 가디너를 만나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를 탄생시켰다. 대단했던 그 공연을 뒤로하고 김선욱은 더 깊은 이해로 5번을 연주했다. 합창석에선 느끼지 못했던 그의 연주는 새롭게 다가왔다. 아름다웠다.

 

이어진 베토벤 5번 교향곡도 공연장의 연주에선 놓쳤던 부분들이 들렸다. 현악의 울림이 더 부드럽고 깊게 전달되면서 오케스트라는 깊은 선율이 느껴졌다. 작년 1월의 말러 1번, 12월의 모차르트 주피터, 1월의 베토벤 5번과 3월의 베토벤 7번을 들으면서 서울시향의 사운드에 익숙해져다. 덕분에 이 음반에서 나는 서울시향만의 분위기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해부터 베토벤의 교향곡과 협주곡을 많이 찾아 들었다. 프란츠 브뤼헨과 18세기 오케스트라의 베토벤은 목관악기의 울림이 좋았다. 고악기의 저음을 제대로 살린 브뤼헨의 베토벤은 4번 교향곡 1악장과 7번 교향곡 2악장이 하이라이트였다. 리카르도 샤이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전집은 시원시원하고 간결했다. 시대와 잘 어우러진 베토벤이었다. 인상깊었던 앨범은 2012년 존 엘리엇 가디너와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가 카네기홀에서 연주한 베토벤 7&5 음반이었다. 여지껏 들었던 베토벤중 가장 개성넘치고 흥겨웠던 연주였다. 그러면서도 베토벤의 의도를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살아있었다. 가디너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서울시향의 새 음반이 발매되기 전 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베토벤 5번이었다.

 

공연 이후 더 많이 베토벤을 듣게 됐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5번을 자주 들으면서 4월에 발매될 서울시향의 5번을 기다렸다. 악보를 보고, 연주 영상도 보면서 베토벤의 걸작이 정명훈의 손에서 살아나기만을 기다렸다. 음반은 기대에 부응했다. 현악파트의 굵고 부드러운 사운드는 서울시향만이 가진 미쟝센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조지훈의 승무가 떠오르는 연주다. 다른 연주에선 뭔가 부족하기만 했다고 느껴졌던 관악 파트에도 아쉬움이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벅찬 눈망울로 서로를 끌어안던 단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특히 관악파트 연주자들이 보인 표정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왠지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서울시향의 음반은 음표들을 아쉬움없이 잘 살려냈다. 브뤼헨, 가디너와 함께 내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베토벤 5번 교향곡이다.

 

한시간여의 플레이타임. 아무것도 못한채 나와 요섭형은 음악만 들었다. 다 듣고 나니 머리가 띵 할정도로 어질어질했다. 이렇게 집중해서 음악만 들었던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제서야 나 커피를 부탁했고 햇볕을 받으며 한모금 마시자 정신이 들었다. 감동의 전달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음악이 끝나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음악도 좋았고, 커피도 맛있었다.

 

서울을 닮은 음악을 하는 오케스트라가 서울에 있다는건 감사한 일이다. 한달에도 몇번씩 서울시향의 공연이 열린다. 도시를 한껏품은 오케스트라가 가까이 있다는건 참 행운이다.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맛과 향을 선사하는 커피 한 잔 처럼, 오직 서울에서만 그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있어 좋다. 수십년동안 자신들만의 사운드를 찾아 헤맸던 명 오케스트라처럼 서울시향도 오크통에서 잘 숙성된 위스키 같이 깊어졌으면 좋겠다. 더 많이 공연을 가고, 더 많은 서울시향의 음반을 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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