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넘어가는 방학이었다. 방학까지 학원에 다니고싶지않아,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내내 놀았던 기억이 있다. 딱히 할일이라곤 없었는데,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뒷산에 올라 쌓인 눈을 가지고 노는게 전부였다. 신발에 양말까지 가득 젖고나면, 집에들어와 보일러때문에 따뜻해진 이불장 밑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던 생각이 난다.

 

놀았던 시간은 좋았지만, 뒤쳐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초등학생이 뭐 그렇게 챙겨야할게 많았냐겠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이리저리 학원을 다니느라 바쁘기도 참 바빴다. 그리고 한달이 지났을까, 다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안될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입대했다. 꼬박 3년의 시간을 보냈고, 막간의 여행이 있은 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넉넉한 공백기는 가질 수 없었다. 쉬더라도, 충분한 이유는 만들어놓아야했다.

 

회사 옆 건물에 행사가 열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슬쩍 둘러보다가, 익숙한 트럭을 발견했다. SNS와 방송에서만 보던 그 트럭, 바람커피로드 이담님이었다. 단숨에 내가 쓴 책과 명함을 들고 이담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처음뵙지만, 인자하게 웃으시며 커피 한 잔 내려주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도 마셨고, 르완다와 과테말라도 내려주셨다. 마신 커피들은 통돌이 로스팅에도 불구하고 맛이 깊었고 잔향이 오래 남았다.

 

이담님과 별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커피를 내리며 방랑하는 인생이 어떤지 묻고싶었지만 딱히 대답을 듣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내리는 커피는 어떤 커피인지 이야기를 나누기만해도, 나는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커피는 분위기에 매우 취약한 음료다. 어디서 어떻게 마시는지에 따라 맛은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퇴근이 있는 커피가 맛있는 이유는 '퇴근이 있기'때문이 아닐까. 줄곧 퇴근후에 커피를 마셨지만, 불확실한 미래가 발목을 잡고있어 그 맛있던 퇴근후의 커피도 씁슬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바람을 가르며 방방곡곡 누비며 마시는 커피는 어떤 맛일까.

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커피는 어떤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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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니 커피 한 잔 생각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제법 따뜻한 커피가 어울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짧은 글 한 편이 커피 한 잔 권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면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220716&sid1=001

 

 

커피여행자 이담

twitter @yidams / facebook baramcoffeeroad / instagram yidam

 

2014년, 공연 예술잡지 월간객석에 연재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넷으로 공개된 두 개의 원고를 이곳을 통해 공유드립니다.

 

 

사직동 커피한잔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738

 

해방촌 콩밭커피로스터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824

오랜만에 결혼식에 동창들이 모였다.

 

토요일 낮 12시, 꿀같은 낮잠을 포기하고 달려온 의리의 친구들. 누구는 새벽까지, 누구는 당일 아침까지도 사무실에 있었다. 그리고 한 친구는 예정된 주말근무를 빼기 위해 휴가를 내고 철야작업을 했지만 비상이 터져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어렵게 모인만큼 힘든 한 주를 보냈음에도 다들 밝은 표정으로 안부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이어진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 그래서 넌 무슨 일을 하는데? 라는 질문. 다들 웃으며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대답만 한다.

 

그래도 커피는 안다. 스페셜티 커피의 장점이라면, 추적가능성 traceability일 것이다. 내가 마신 커피가 누구의 손에서 어떤 품종, 토양, 기후에서 어떻게 재배되고 가공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수입되어 로스팅되었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내렸는지 확인 가능하다. 주말의 의무(결혼식 참석)에서 퇴근하고 홀로 찾은 브루브로스에서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주했다. 네가 누군지 정체성이 분명하니, 적어도 나보다는 사정이 낫구나.

 

콜롬비아 스트롱을 시킨다. 부산의 카페 노갈레스에서는 콜롬비아 생두만을 수입한다. 콜롬비아 생두만을 수입하는 만큼 생두도 품질이 좋다는 브루브로스 바리스타의 평가와 설명이 이어진다. 50ml 남짓의 작은잔에 담겨온 커피의 향은 매우 짙다. 마치 내가 콜롬비아 커피야! 라고 말하는것 같다. 비교적 약한 배전도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맛을 선사한다. 달콤하고 새콤하고, 때로는 매콤한 맛도 느껴진다. 스파이시한 느낌도 물론이고. 잔향도 오래남는다.

 

'브루brew'라는 말이 있다.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에스프레소도 브루의 일종이라 볼수도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로 따져 들어가면, 에스프레소가 아닌 커피를 브루잉이라고 부르는편. 스페셜티 커피 시대를 맞아 클레버, 케맥스, 에어로프레스, 프렌치프레스, 사이폰 등 다양한 기구들이 브루잉툴로서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덕분에 다양한 툴로 브루잉을 하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브루브로스는 브루잉, 그 중에서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준다. 시간과 온도, 원두와 추출양 등의 레시피에 맞춰 물을 부어주는 푸어오버(Pour Over)와는 다르게 핸드드립은 좀 더 섬세한 컨트롤을 요한다. 시간도 오래걸릴뿐더러 더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는 핸드드립은, 올드스쿨에서 커피를 마시는 시절에만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커피였다. 하지만 요즘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 이렇게 제대로 내려주는곳도.

 

생두의 탄생부터 핸드드립까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한 잔의 커피와 다시 마주한다. 나는 언제쯤 이처럼 분명해질수 있을지. 수많은 정체성들 사이에서도 오롯이 내스스로 서 있을수 있는지. 맛에 감탄하고 있으니, 바리스타께서 강배전으로 내린 스트롱 커피 한 잔을 더 권한다. 부드러운 밸뱃의 느낌이 입을 감싼다. 달콤하고 치명적이다.

 

당분간은 이곳을 찾아 커피 한 잔 앞의 위로를 받을수 있을것 같다.

 

 

 

브루브로스 커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68-30

02-325-3580

평일 0900-2300 / 주말 1000-2200

요즘들어 부쩍 강남에도 스페셜티 카페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좀처럼 근처에도 가질 않지만, 그럴싸한 카페가 있다길래 외근 중 망중한을 즐기러 한 카페에 들렀다. 자세한 묘사를 시작하면, 인스타그램으로 유명세를 탄 그 카페를 알아차리는 이들이 있을테니 생략하기로 한다. 빈티지한 인테리어와 한낮에도 사진을 찍으러 몰려드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러 온 것인지, 찍으러 온 것인지.


이쯤되면 혼란스러워진다. 카페는 과연 어떤 공간인가. 

나에게 카페는 '커피가 맛있어야'하는 공간이다. 카페의 주제가 커피가 아닌 곳들(북카페, 애견카페 등)을 제외하고 커피가 메인이 되는 곳이라면 당연히 커피가 맛있어야지 않을까. 어느 밥집에서든 설익은 밥을 내어준다면, 바싹 탄 음식이 나온다면 문제가 되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 낮의 커피를 즐기러 방문한 이곳의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서, 맛집과 먹방과 쿡방이 지배하는 시대에 카페의 운명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심오한 고민속에서도 카메라 소리는 찰칵 찰칵.


카페에 들어서면 싱글그룹 머신이 2대가 있다. 보통의 카페라면 2그룹(그룹헤드가 2개인 머신)을 사용한다. 아무래도 머신의 크기가 작으면, 추출 안정성이 좋지 못할 수 있다. 물론, 드문드문 커피를 내리는 카페라면 싱글그룹 머신으로도 충분히 좋은 커피를 내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끊임없이 커피 주문이 쏟아지는데, 두 대의 싱글그룹 머신이 훌륭한 디스플레이를 자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커피가 맛있으면 괜찮은거 아닐까. 원두가 훌륭하고 바리스타가 머신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사실 머신의 크기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게 시킨 커피는 아무리 애를쓰고 마셔봐도 맛있지 않았다. 보통은 한 잔의 커피에 위로와 휴식을 기대하며 카페를 찾는다. 하지만 주문한 커피가 맛없으면 우울함이 찾아온다. 인테리어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빈티지를 지향하는 의자는 앉는순간 삐걱 소리를 내며 기울었고, 불편함이 가시질 않아 옆에 있는 더 작은 의자에 몸을 옮겼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이 공간을 찾는 것일까.


다시 가을답지 않은 더위가 가득한 강남의 대로변을 걷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회사로 들어가 직접 내린 커피로 다친 마음을 위로 받고싶은 심정이다. 


서울의 커피는 서울을 닮았다. 설탕-프림-인스턴트 커피가 믹스되어있는 믹스커피의 탄생이 그렇다. 어디서든 빨리 커피를 타야하고, 후루룩 들이켜야 하니 인스턴트 커피는 1976년 처음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시장을 지배했다. 언제나 피곤하고 우울하니 달디단 믹스커피에 담배라도 한까치 피어야 정신이 들지 않겠는가. 카페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넓은 도시에 내 공간 하나 가지고 꾸밀 여력이 없으니, 그럴싸하게 꾸며놓은 카페에 대리 만족을 하는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5천원이면 그 공간은 내것이 되고, 친구들과 둘러앉아 하염없이 수다를 떨 수 있으니. 그럼에도 제법 맛있는 카페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2호점을 확장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어쨌든 이 도시가 망하지 않은 이유들이 문득 생각난다.


곧 동부이촌동에 헬카페 2호점이 오픈한다.


애증의 도시 서울에서 맛 볼 수 있는 최고의 커피 한 잔을 기대해본다.


 



직장인에게는 두 잔의 커피가 있다.


아침(혹은 저녁), 하루의 근무를 혹은 남은 끝자락을 버티기 위해 마시는 커피

온전한 퇴근이 있는 저녁, 남은 하루를 나를 위한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 마시는 커피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두 잔의 커피가 모두 의미있지만, 당연히 후자가 더 맛있지.

 

논현동 사무실로 출근한지 1년, 성의없게 쭉쭉뻗은 강남의 대로변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가장 마음에 안들었던 것은 커피였다. 강남에서도 꽤 비싼 임대료를 자랑하는 대로변에 사무실이 있는데, 이런곳이라면 어떤 카페도 살아남기 힘들었을듯 싶다.


강남역에 릴리브가 생겼다는 소식은 가뭄에 단비였다. 이제 강남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는것인가! 물론 퇴근후에 강남역을 가는 일은 최악이다. 압구정에서 신사까지 꽉 막힌 버스, 콩나물 시루같이 사람들이 가득찬 거리. 퇴근후에도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다보면, 이게 사는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맛있는 커피라면 가야하지 않겠는가. 하늘은 높고 미세먼지는 살찌는 가을의 뿌연 하늘을 바라보며 릴리브에 도착한다.

 

 

 

플랫화이트를 시킨다. 점원은 묻는다. '아이스로 드릴까요?'

다시 무더워진 날씨덕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네'라고 대답한다. 아 실수했네. 

다른 음료에 비해 우유의 양이 비교적 적은 플랫화이트는,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마시는게 좋다. 아무래도 많지않은 우유와 커피에 얼음까지 녹아버리면 커피맛은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일전에 인테리어 짱짱한 카페에 들러 플랫화이트를 아이스로 시켰다가 절반은 버렸던 기억이 난다. 어쩔수 없지. 후루룩 들이키면 되겠지. 


플랫화이트는 보통 150ml 남짓의 작은 잔에 나온다. 유행처럼 작은 유리잔에 담겨 나오기도 하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아무래도 유리잔의 단가가 높지 않고, (조금)멋있어 보여서 그러는게 아닐까하고 추측해본다. 릴리브에서는 작고 귀여운 테이크아웃 잔에 커피가 나온다. 받자마자 성급하게 한 모금 후르륵. 개업초기보다 배전도가 살짝 올라 고소함이 더 강해졌다. 강남역 멋쟁이 언니 오빠들 사이를 비집고 3층으로 올라간다.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높은 곳에서 바라도면 더 신기한데, 언덕배기 끝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은 끝임없이 쏟아지는 폭포같기도 하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얼음은 녹는다. 그럼 오늘도 실패인건가, 하며 후루룩 한모금을 마신다. 생각보다 괜찮네. 그래도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려면 빠르게 마실것을 권장한다. 얼음이 녹아서 맛있는 커피는 많지 않으니까. 


플랫화이트, 피콜로, 코르타도, 마끼아또. 이름도 복잡하다. 각각의 메뉴가 무얼 의미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대략의 정의는 있지만 쉽게 확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심지어 매장마다 레시피도 조금씩 다르니까 말이다. 당신이 마신 한 잔의 커피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커피를 만든 바리스타 밖에 없다. 물론 추천하는 방법은 따뜻한 커피는 식기 전에, 아이스커피는 얼움이 녹기전에 후딱 마시는 것. 질문이 많으면 커피는 맛없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선 다시 여름이 돌아온듯 사람들의 땀냄새가 가득하고, 버스에 내려 멀리 바라본 하늘은 미세먼지로 뿌옇다. 그래도 오늘은 퇴근후에 한 잔의 커피가 있으니 얼마나 평화로운가 하며 집으로 향한다.

 

 

 

릴리브 강남점

 

서울시 강남구 강남대로 102길 21

평일 0800-2300 / 주말 1100-2300

 

 

 

 

뱀발.

북 콘서트를 합니다. 10월 2일이고, 와우북 페스티벌의 행사 일환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링크를 붙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onoffmix.com/event/7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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