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과 춘향이가 전부인 동네라고 생각했기에, 한옥을 개조한듯한 찻집에는 별 기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춘향이를 외쳐대니 쌍화차는 맛있겠지, 오미자차는 마실만하겠지 하며 그곳의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여니 난로에서 풍겨오는 훈훈함이 몸을 감쌌습니다. 요즘엔 좀처럼 보기 힘든 한옥의 구조도 눈을 사로잡았죠. 가장 흥미로웠던건 연탄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있는 라마르조꼬 상자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리니 리브레 커피가 보이더군요. 남원에서 춘향이와 추어탕이 아닌 리브레와 라마르조꼬를 만나다니.
서둘러 커피를 시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자, 이제 커피를 시킵니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카푸치노 한 잔. 바리스타는 숙련된 솜씨로 두 잔의 커피를 내립니다.
에스프레소는 다크리브레입니다. 잘 숙성된 덕분인지 단맛이 풍부하더군요. 묵직한 벨런스가 자극적인 맛을 감싸줘서 편한하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깊은곳에서 품어나오는 넛트향은 커피를 넘긴 후에도 오랜시간 지속됐습니다.
카푸치노의 우유거품은 이런 에스프레소의 특징을 잘 이어받았습니다. 잘 데워진 우유는 고소함을 잔뜩 머금고 있더군요. 토피넛 라떼를 먹는듯한 느낌이랄까요. 조금 연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대체로 밸런스도 좋았고 포근한 느낌이 살아있어 겨울에 잘 어울렸습니다. 계절감이 살아있는 카푸치노네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보통은 머신은 '보여주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이름이 다 보이도록 디스플레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여기선 수줍게 '조꼬'정도만 보이는 라마르조꼬입니다. 보일듯 말듯 하는 저 라마르조꼬의 로고도 이곳의 분위기를 말해줍니다. 메져그라인더도 수줍게 자리잡습니다.
뒤에는 공장포스를 풍기는 말코닉501 그라인더와 모카마스터가 보입니다.
'커피가 참 달아요'라고 말하자 바리스타는 대답합니다.
'리브레는 항상 잘 숙성된 원두를 보내주죠. 저는 그걸 믿고 잘 뽑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곳에선 로스팅은 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리브레에서 커피를 공급받았다고 하네요. 로스팅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라고, 잘하는 로스터를 믿고 커피를 내리는게 오히려 더 좋지 않느냐는 얘길 합니다. 로스팅은 욕심이 없다고 하네요. 로스터에 대한 강한 신뢰와 맛있는 커피에 대한 신념이 한 잔의 커피를 더 주문하게 만듭니다.
커피메뉴가 간단하다는 점도 주목할만합니다. 일전에 싱글오리진의 메뉴가 5개를 넘기지 않는게 좋다고 말한적이 있죠. 에스프레소 메뉴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푸치노. 딱 4개정도의 메뉴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음료 관리의 측면에서, 커피맛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바닐라 라떼나 캬라멜 마끼아또 등이 메뉴에 올라와 있는 카페와는 분명 차이가 있죠.
그 외에 전통차 메뉴가 눈에 띕니다.
손님들과 '타협'을 위한 전통차 베리에이션 메뉴도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협'이 무엇인지는 차차 설명하겠습니다.
이 한옥은 '진짜 한옥'이라고 합니다. 강원도에서 살던 한옥 명장이 지리산 밑자락에 지으셨다고 합니다. 난방은 난로와 온돌(전기온돌이라고 합니다)이 대신합니다. 건물이 자연스럽게 외부의 공기를 받아들이고, 온돌과 난로는 그 공기를 서서히 녹입니다. 카페 내부가 심하게 건조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훈훈한 느낌을 주는건 이 덕분이죠. 여기선 커피를 마시는 것 뿐만 아니라 한옥의 맛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재미입니다.
곳곳에 보이는 쌍화차들. 돌솥으로 만든, 숟가락으로 퍼먹는 저 쌍화탕이 이곳의 베스트 셀러더군요. 어르신들, 젊은이들 너나할것없이 쌍화차를 주문합니다. 그래서 저도 쌍화탕을 주문해봅니다.
손님들이 있어 카메라에 잘 담지는 못했습니다만, 인테리어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서울의 카페에선 발견할 수 없는 남원 산들다헌만의 매력포인트입니다.
쌍화차는 돌솥잔에 오랫동안 데워진 후 나옵니다.
'이곳에선 쌍화차 허투로 하다간 욕먹습니다. 쌍화차를 오랫동안 마셔온 분들이 많거든요.'
산들다헌이 처음 오픈했을땐 커피는 주메뉴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장은 오랜시간동안 차에 집중했다고 하네요. 커피는 차의 맛이 어느정도 자리잡은 후에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쌍화차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정해진 쌍화차 재료를 넣고 잘 끓여낸 후에, 그 맛을 살릴만한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작업이 오랜시간동안 이뤄졌습니다. 쌍화차의 맛은 깊습니다. 각종 한약재에서 느껴지는 풍미가 잘 전달되더군요.
숟가락으로 건져먹을 수 있는 밤 건더기들은 산들다헌 주인장이 고민한 결과입니다. 어떻게 쌍화차를 내도 쓰다고 하는 손님들과의 타협점을 찾은거죠. 오랜시간 밤을 익히면서 그 밤에서 나오는 단맛을 이끌어 낸겁니다. 설탕을 부어넣는것보다 이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것이죠.
커피를 아무리 잘 내려도 쓰다고 하는 손님들이 있는건 당연합니다. 아직 맛있는 에스프레소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히지 않은것도 있고, 이곳을 찾는 많은 어르신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럽을 넣는다거나 무조건 연하게 커피를 뽑는것도 쉽게 정할 수 있는 문젠 아니죠.
산들다헌의 주인장은 계속해서 고민하며 타협점을 찾아갑니다. 제대로 차를 만들고 커피를 뽑으면서,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말이죠. 설탕과 시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진짜 커피와 차의 풍미를 전달하기 위해 산들다헌의 바리스타는 매일같이 고민합니다.
맛에 대한 타협부터 시작해서 음악적 취향, 커피에 대한 소신까지. 여러모로 주인장과 통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오랜 친구를 만난것처럼 스스스럼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그러다가 등장한것이!
바로 요녀석입니다. 카카오 64%짜리 초콜렛이죠. 시럽과 설탕의 단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겐, 이 초콜렛으로 만든 핫초코는 쓰기만 합니다. 하지만 사실 여기의 핫 초콜렛은 깊은 풍미를 자랑합니다. 잘 뽑아내린 에스프레소처럼 과일의 신맛도 가지고 있고 깊은곳에서 여운을 남기는 단맛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진하고 쓴 한 잔의 핫초코일뿐이죠.
여기서 산들다헌 바리스타가 찾은 타협점은 구운 머쉬멜로입니다. 좋은 재료를 포기 하지 않고, 손님들의 입맛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낸것이죠.
맛있는 커피에 대한 고민도 똑같습니다.
좋은 물로, 좋은 원두로, 좋은 기계로 최선을 다해 커피를 내리면서도 그는 고민합니다. 혹여나 이 커피가 쓰다고 느껴지진 않을지,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을지. 그의 고민이 담긴 한 잔의 커피가 저는 너무 소중하기만 합니다.
손님들이 어느정도 빠지자 가게를 둘러봅니다. 은은한 조명이며, 가져다 놓은것들이며 어느 하나 흘겨볼게 없습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가르는 저 '발' 또한 매력포인트입니다. 인위적으로 벽을 치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죠. 맛있는 음료는 물론이요, 편안한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하는 매력포인트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신 잔이 8잔. 이후에도 몇 잔 더 얻어마셧으니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배가 차는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커피와 쌍화차도 훌륭했지만, 전통차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메뉴들도 훌륭했습니다. 대추야자 스무디는 설탕이나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고 깊은 단맛을 선사합니다. 녹차스무디는 진짜 말차를 듬뿍 넣은 덕분에 녹차향이 풍부하구요.
바를 어질러 놓은건 전부 저의 잘못입니다.
어둑어둑 해질 때까지 쉬지않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 산들다헌 가는길 -
광한루에서 춘향교 방향으로 직진. 두번째 골목에서 좌회전. 직진하면서 좌측을 돌아보면 산들다헌.
혹은 남원 메가박스 근처. 자세한 위치는 전화로 확인. - 전북 남원시 쌍교동 103-2 , 063-632-3251
- 월요일 휴무, 연휴 당일 휴무(추석 당일, 설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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