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범랑포트로 드립 커피를 내리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모난 곳 없이 평평하게 커피가 가라앉으면 맛있게 내려졌단 뜻이다.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엔 도자 전공을 하는 H가 선물해준 컵만 쓴다. 컵이 입에 닿는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부탁해서 몇개의 컵을 더 주문제작 해야겠다.

 

커피를 내리면서 비어있는 원두 통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저 원두 통들엔 내가 매일 볶은 원두들이 들어있었다. 매일같이 로스팅을하고 테이스팅을 하고 포장하기도, 판매하기도 했다. 문득 대학시절이 생각났다. 아직 대학'시절'이라 하기엔 나는 졸업한지도 얼마 안됐고 또 젊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것들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다보니 그 기억들을 '시절'이라 명명해도 좋을것이라 생각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K와 만나서 커피를 마셨다.

K와 함께 했던 여러가지 일들은 내가 대학시절 '전성기'라고 불렀던 때에 벌어졌기 때문에 언제나 좋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우린 그 시절을 가끔 회상했다. 소설, 음악, 영화, 커피 그리고 담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문득 최근들어 이런 이야기를 해본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자리잡은 곳에서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마치 단절됐던 것을 이어가는 것 처럼 풀려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K와 이야기하면서 몇번을 울컥했다. 잊고 있던 무언가를 찾아서 기쁜 것과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그 때, O기자님한테 연락이 왔다. 이제사 회식이 끝났으니 함께 보자는 전화였다.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신촌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학생들이 가득했다. 같은색의 옷을 차려입은 무리가 가장 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고 구석에는 기타를 치고 노래부르는 무리들이 있었다. 함께 오지는 않았지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나오면 다들 따라부르곤 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이따금 내 귀에도 들리곤 했다. 막차 시간을 아쉬워하며 떠나는 모습이며, 흔한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나도 내 '대학생활'을 생각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대학생때는 한없이 불균형했던 시기였다. 한없이 열정에 타오르거나 혹은 회의주의자가 되거나. 그래도 됐고, 그래야했고, 그럴 수 있었다. 생기와 활기가 넘치는 시기였다. 만나는 사람들은 위계질서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여행은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었다. 다음날을 살아가는것에 대한 고민이 즐거웠다. O기자님은 무얼 하고 살고싶냐고 물었다. 나는 할 일 없으면 기자나 하죠 하고 농을쳤다. 대학생때라면 선뜻 나왔을 대답이 힘들게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얼마전 Y형은 나에게 이런말을 해주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변하지 않는게 중요하다는 것만 명심해'. 돈이나 시간은 매정하게 변해버리는 것 만큼 중요하진 않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변하지 않고 로스팅을 하고 글을 쓰고 싶다.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는일, 영화를 보는 일을 게을리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어떠한 행위들을 떠나서 나와 관계맺은 사람들과 변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조금씩 예전의 그 모습을 찾아가야겠단 생각을 한다. 비어진 원두 통을 채워나가기 위해 로스팅을 해야겠다. 아름다운 시절을 '그 시절'로만 생각하고 싶진 않다. 지금이 아름다운 시절이 될 수 있게, 조금씩 해답을 찾아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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