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적어도 5번 넘게 영화를 봤을 테고 좋아하는 장면이나 대사는 수첩 어딘가에 적어뒀을 것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에 감탄하고 대사에 공감할 것이다. 기차 여행을 떠날 때면 혼자 영화의 첫 장면을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볼 것이다. 독일어로 싸우고 있는 부부는 없는지, 혼자 음악을 듣고 있는 남자는 없는지 그리고 줄리 델피가, 에단 호크가 아니 셀린느와 제시가 있는지.

 

그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생각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이번이 여섯 번 째던가. 무심코 넘겼던 오프닝부터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영화를 틀었을 때, 나는 음악이 잘못 나온 줄 알았다. 듣고 있던 음악을 끄지 않았던가? 하고 일시정지를 눌렀다. 함께 꺼지는 음악. 아, 헨리 퍼셀이 오프닝 음악이었어?

고풍스러운 헨리 퍼셀의 음악함께 그 유명한 기차 신이 시작된다. 철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영상이 흐른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퍼셀의 음악이 들려온다. 미묘하게 들려오는 하프시코드 소리는 기차가 내는 철커덕 소리와 어우러져 긴장감마져 형성한다. 비엔나로 향하는 열차의 풍경은 음악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잠시 숨을 고르듯 긴장을 향해 고조되던 음악이 멈춘다. 그리고 셀린느의 등장. 숨이 멎는줄 알았다. 바로크 시대의 악기편성을 그대로 사용한 퍼셀의 음악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등장하다니.

바로크 음악에 매력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찾아듣기 시작하면서 늘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인데, 이 음악은 과연 어떤 장면에 어울릴까. 가령, 영화로 치면 어떤 장면에 등장해야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류트소리와 하프시코드의 고풍스러운 사운드가 어색하지 않으려면 꽤 복잡한 장면을 상상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열차 카페테리아 신에서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헨리 퍼셀. 아, 이렇게 어울릴 수 있는 건가.

 

 

음악에 집중해 비포 선라이즈를 본다면 새로운 장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사랑스럽고 가슴이 콩딱 거리는 장면은 음악감상실 씬이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발견한 레코드 샵에서 셀린느는 음반을 고른다. 그리곤 감상실에 들어가 제시와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흐르는 순간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시선과 감정이 담긴 그 장면을 보면 왜 이 영화를 몇번이고 다시보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끊임없는 대화가 멈추는 그 순간, 흐르는 음악과 그들의 표정은 긴 여운을 남겨 다음 장면까지 오버랩되기도 한다.

 

 

 

 

사실 내가 이전까지 발견했던 음악씬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만 집중해도 러닝타임은 충분히 모자랐다. 어떤 장면에서 어떤 대사가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가는 그 순간에야 나는 음악이 들어간 장면에 젖어들 수 있었다. 음악감상씬이나 비포 선셋에서 셀린느가 연주하는 왈츠나, 영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음악은 그정도였다. 하지만 흐르는 음악에 집중하고 나니 이 영화에 쓰인 음악 장치들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거리 곳곳을 지나다닐때 흐르는 바로크 음악은 그곳이 비엔나이기 때문에 어울리기도 했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분위기를 적절하게 활용해 음악을 틀었기에 어색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500년이 지난 음악이 지금의 영화와 어울릴 수 있는 이유다. 오프닝에서 받았던 충격은 계속 이어졌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요요마가 연주하는 첼로소나타, 베토벤의 소나타도 자신들이 언제 등장해야할 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스르르 등장하고 사라진다.

 

사실 새로운 발견이라 하기엔 부끄러운 것일수도 있다. 수없이 영화의 장면들을 겪었을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한 음악이고 장면들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강렬하게 음악이 들려왔던 감상이었기에 영화를 보며 메모했던 것들을 써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있으면 비포 선셋의 속편이 등장한다고 한다. 10년이 흐른 뒤에도 제시와 셀린느는 여전할까. 그리고 영화속에 흐르던 음악들의 감동은 여전할까. 아직까지 기차여행을 떠날 때면, 혼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잊지못할 장면을 선사할까. 영화관에 찾기 전, 다시 한 번 더 영화를 챙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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