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기차역에 갔을때 장항선 열차를 본 적이 있었다. 장항이란 이름은 쉽게 잊혀지질 않았다. 주황색 무궁화호 열차에 장항이라 써 있는 그림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에, 나는 기차여행 하면 의례 장항을 생각하곤 했다. 물론 24년을 살면서 장항에는 발을 디뎌본 적도 없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하며 장항역에 발을 디뎌본 건 13일. 장항 선셋 페스티발을 보러가기 위해서였다. 

우선 장항역에 대한 사연이다. 장항선은 1922년에 충남선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곧 이어 이 충남선은 천안에서 전북 익산을 연결하는 노선이 됐고 장항선이라 불리게 됐다. 1955년의 일이다. 장항역은 장항선의 종착점이었다. 즉, 내가 어렸을 적 본 장항선 열차들은 모두 장항역을 종착점으로 했던 것이다. 장항역은 2008년에 장항 화물역으로 개칭되면서 더 이상 민간인들을 수송하지 않게 됐다. 대신 익산으로 이어지는 직선 코스가 만들어졌고, 장항읍내에서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새로운 장항역사가 만들어졌다. 장항역의 이동으로 장항 읍내는 저절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장항으로 가는 열차가 증편되긴 했지만, 열차를 타기 위해서 읍내에서 역까지 가야 하는 길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도착했을 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장항역만 댕그라니 있었다. 여기서 무슨 축제를, 하고 택시를 잡아 읍내로 향했다. 나는 택시기사에게 역사가 이전한 역사에 대해 들으며 장항화물역에 도착했다. 축제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보이긴 했지만 읍내는 황량했다. 폐허가 된 건물들, 문을 닫은 가게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공장들. 여기가 한국이 맞는가 생각할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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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 선셋 페스티벌의 시작은 1999년으로 올라간다. 역이 이전되기부터 장항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폐공장을 활용해 대안적인 문화공간을 만들고, 젊고 패기있는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했던것이 이 페스티발의 시초다. '공장미술제'라는 이름으로 젊은 작가들 중에서도 젊은 작가들을 선발하여 보기드문 대형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던 이 미술제는 2000년 두번째 전시를 끝으로 이어지질 못했다. 끈기 없는 정부의 지원정책 때문이었다. 

2012년, 지자체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다양한 공연과 함께 장항선셋페스티발이 문을 열 수 있었다. 공장미술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공연을 열어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몽구스, 피터펜 컴플렉스 등 보기 드문 라인업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법한 장항에 색동옷을 갖춰입은 젊은이들이 모였다. 그들은 어렴풋이 장항의 역사에 대해서 듣고, 쇠락한 읍내를 둘러보며 사람들이 장항을 찾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 노란머리, 파란 눈의 술취한 외국인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작가들에게 장항은 확실히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홍대의 어설픈 카페 인테리어가 빈티지를 모방한 것이었다면 장항 읍내는 그야말로 진정한 빈티지였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공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전시공간이고 공연장이었다. 그리고 수 많은 젊은이들에게 지루한 여름을 뜨겁게 보내기엔 너무나도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내가 장항에 왔다니. 장항이라니.

이름있거나 수 번의 개인전시를 거치며 이름을 날린 작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신진작가들이었다. 기회만 되면 대박을 터트리려고 눈을 부라리는 미술 시장에서 힘겹게 살아 남은 젊은 작가들은 장항에서 자신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쳤다. 

매서운 장맛비도 공연을 멈출 순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뜨끈뜨끈한 홍대앞 밴드들의 공연은 실로 환상적이었다. 폐공장에서의 하룻밤이라니. 모기가 아무리 작정하고 팔다리를 물어뜯어도 춤추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광란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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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은 노년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공연장에서 만났던 한 아저씨는 서울로 올라간 아들이 잘 내려오지 않는다면서 우리에게 맥주를 권했다. 짧게나마 아저씨의 사연을 들으면서 장항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주민들도 타지에서 온 사람들과 같은 가격을 내고 티켓을 사야 공연장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저씨는 처음에는 20대만 참여할 수 있다는 축제로 알았다고 한다. 공연 관계자에게 물어보고서야, 모든 연령층이 즐길 수는 있는 축제란 얘기를 듣고서야 용기내어 티켓을 구입하셨다고 맥주 한 잔 사주시며 얘기해주셨다. 평소 자주가던 음식점에 들어가려던 부녀회장님은 공연장 통제요원에게 신분을 밝혀야 했고, 말도 안통하는 외국인들의 질문세례에 마트 아주머니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과연 이 축제는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

모든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축제였지만 사실 조용한 동네에서 살아오던 어르신들에게는 난감한 공연이었다. 미술전시는 급박하게 기획이 됐다. 지역과 유대되지 않은 주제의 전시는 해석을 불가케 했다. 좋은 작가, 젊은 작가, 뛰어난 상상력은 장항에게 낯선 주제였다. 작가들이 전시를 위해 장항을 몇 번이나 방문했으며 얼마나 이 곳을 느꼈는지 궁금했다. 아니면 그냥 작품만 전시장에 걸어놓은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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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장항선셋페스티벌은 훌륭한 대안문화축제다. 스러져가는 도시에서 지역과 유대한 잔치를 벌이는건 어디서나 필요한 일이었다. 영국의 몰락한 탄광도시가 '북방의 천사'라는 100톤짜리 거대한 조각상을 설치하며 유명한 관광지로 거듭났던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접근 방식은 항상 고민을 해야한다. 북방의 천사가 게이츠 헤드에 세워지기까진 많은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예술은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을 주지만 한편으론 이질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도 한쪽 가슴이 답답했던건 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고민을 사람들은 얼마나 했을까.  뜨거운 밤을 보내는 그들의 가슴에는 과연 무엇이 남았을까. 5년만에 옛 장항역에 화물선이 아닌 열차가 들어온 것에 대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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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전시는 22일까지 이어지며 읍내 곳곳에서도 소소한 행사들이 이어진다. 당분간은 장항에 사람들이 붐빌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끝가지 고민을 해야한다. 뜨거웠던, 열정적이던 공연을 기억하며 장항에 대해 생각을 해야할 것이다.  2013년에도 이 축제가 의미있게 개최되려면 말이다.

꿈만 같았던 1박 2일의 짧은 장항여행. 앞으로 한동안은 이 복잡한 생각과 마음으로 어지러울 것 같다. 그리고 장항이 그리워질 것 같다. 내년에도 그 곳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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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정보

2012. 07. 13. -  2012. 07. 22. 열흘동안

장항읍, 금강중공업 창고, 어망공장 창고, 미곡창고, 물양장부지, 장항화물역사, 송림백사장 등 장항 일대.

예매는 인터파크, 문의는 선셋장항컨퍼런스 추진위원회(041-950-4723)

공장미술제, 대안공간 전시, 미디어 아트스쿨 등 다양한 전시와 문화행사.

 http://www.sunset-jang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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