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라디오 주파수는 93.1MHz. 내가 좋아하는 실내악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이 진행중이다. 창문을 적당히 열어 빗소리가 잔잔히 들려오도록 맞추어두었다. 잔잔한 실내악들과 어울려 기분이 좋아진다. 평소보다 오래 걸려 서울에 도착했다. 급하게 결정한 서울행이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이 차분해졌다.

 

1.

4개월간의 훈련기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해본다. 본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거나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인생의 최악의 기간이었다. 첫 한 달은 편지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전화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1주 남짓이었다. 취미와 섬세한 취향은 당연히 지킬 수 없었다. 입맛조차도 단순해져서 평생 사 먹은 과자보다 더 많은 과자를 먹었다. 이렇게 하소연을 늘어놓자면 길다. 모든게 무뎌졌다. 그리고 오감이 억압당했다.

지난 두달은 나에게 그동안 쌓여왔던 극심한 스트레스를 푸는 기간이었다. 읽고 싶은 책, 음반을 마음껏 샀다. 먹고싶은 것, 마시고 싶은것(주로 맥주와 커피)도 원없이 먹었다. 가령 일반적인 나의 주말 스케쥴은 이랬다. 토요일 아침 일찍 교보문고나 풍월당에 들렀고 낮에는 무연탄-노란코끼리-밀로-이심-리브레로 이어지는 카페투어를 즐겼다. 카페에선 주로 보고싶은 사람들을 만났고, 적당히 커피를 나눠마셨다. 저녁에는 불광동이나 이태원에서 맥주를 마셨다. 다행이도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들은 나와 동행해주었다. 나는 그동안 하고싶은 말들을 쏟아냈고 그렇게 정신없이 주말이 흘러갔다. 평일에는 틈틈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교육기간은 종종 여유로운 시간을 선사해 심심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도 난 사람들에게 연락해 그간 쌓아두었던 회포를 풀곤했다.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고, 그간 잊혀졌던 감각들은 그 순간에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

문제는 밸런스. 밸런스가 없었다. 지나간 상처들을 치유받고 싶었고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해 미리 보상을 받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지나칠 정도로. 커피와 맥주를 너무 마셔 몽롱했던 기억이 한두번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오랜만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가 흥분해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모든 감정에 있어서 스스로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군대가 사람을 이리 변하게 만드는가. 혹은 내가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었던가. 다시 균형을 잡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앞으로 다가올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2.

지나치게 감상적인 이 기간동안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집중적으로 독서를 했다. 일주일에 2-3권정도. 일과 시간만 끝나면 독서에 매진했다. 헐거벗은 상태에서 읽은 그 소설을은 그 어느때보다도 나에게 강렬하거나 아프게 다가왔다. 존 치버의 '팔코너'나 루쉰의 '아Q정전'은 특히 그랬다. 팔코너에서 주인공이 감옥에서 겪었던 일들이 지난 4개월의 훈련에서 겪었던 일들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아Q가 생각하고, 보여주는 행동들은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몇몇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단체생활, 그것도 군대에서 서로의 가장 낮은 모습까지 보여주는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줬던 역겨운 모습들이 아Q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과 교차했다.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이라는 중국 작가들의 단편집에는 개화시절 중국인들이 겪었던 처절한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최근에, 일거리를 찾아 아저씨가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휴가철을 맞아 주차장 일을 돕기로 하신것이다. 잘 지내시는가 싶더니 오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셨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6주정도 깁스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최근에 어머니는 일하시던 문화센터에서 손님이 가방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오해를 사셨다. 손님은 가방이 없어지자 어머니를 의심하곤 CCTV를 보자고 했단다. 알고보니 가방은 그 손님의 친구가 다른 곳으로 옮겨놨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머니는 서러움에 나에게 문자를 보내셨다. 그리고 얼마 후 일을 관두셨다. 오늘에야 마지막 책장을 넘겼던 그 소설집에서의 강렬한 이야기들이 쉽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시기는 지나가겠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을 하고 있다. 부디 부족하거나 흘러넘치지 않기를. 잘 균형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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