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 Superstar

 

 

 

카펜터즈의 곡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이 곡은 사실 ‘델라니 앤 보니’라는, 기타리스트 에릭클랩튼도 연주를 했었던 밴드의 곡이다. 사실, 이 곡이 처음 나왔을 1969년에는 US싱글 차트 86위에 오른 것이 전부. 게다가 델라니 앤 보니는 유명해지기 전이었고, 이 곡은 B-side에 실렸으니 가만 두면 사라질 그런 음악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날 사랑하겠다고 했던 그 말 기억 나지 않나요?” Don’t you remember you told me you loved me, baby? 라는 유명한 가사와 함께 이 곡이 히트를 친 것은 1971년, 카펜터즈가 리메이크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사실 이 버전은 배틀미들러가 “The Tonight Show Starring Johnny Carson” 에서 연주한 것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가사와 멜로디의 일부가 변한 이 곡은 카펜터즈의 것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 곡은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는 2위, 이지리스닝 차트에선 1위 까지 올랐고, 일본 차트에서는 3위, 캐나다 차트에선 8위에 올라 전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슈퍼스타 록 밴드 소닉 유스가 이 곡을 한참이나 키를 낮춰 리메이크 했던 것은 1994의 일이다.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만들어냈던 소닉유스의 맴버들은, 1991년에는 카렌 카펜터즈를 추모하는 곡을 앨범에 수록할 정도로 그들을 존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곡이 발표되었을때, 리처드 카펜터즈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의 스타일하고 많이 어긋난 연주기도 했을테니까. 공식적으론 “이 곡에 대해 내가 좋다 나쁘다 할 수 있지는 않다.”고만 코멘트를 남겼다.

 

눈 오는 출근길, 사연 많은 슈퍼스타를 들었다.
소닉유스는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연주했지만, 이 ‘슈퍼스타’를 연주할때 만큼은 그들이 가진 서정성을 폭파시켰다고 느껴질만큼 의외의 녹음을 남겼다. 많은 밴드들이 카펜터즈의 영향을 받았을것이고, 소닉 유스 또한 그랬을 테다. 한 곡에 담긴 많은 사연들을 들춰보면 결국엔 록음악의 역사가 얽히고 설켜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장르와 세대를 뛰어넘는 이런 명곡이 탄생할 수 있었을테지.

 

링크는 소닉유스의 슈퍼스타를 남겨놓는다.
가사는 내 멋대로 해석.

 

 

슈퍼스타

 

아득한 오래전의 어느 날,
사랑에 빠졌어
두 번 째 공연 이었던 걸로 기억해
너의 기타, 기타소리는 청명하고 달콤했지
그런데 너는 지금 여기있지 않구나
들리는 것은 라디오 소리뿐

 

기억나니
날 사랑했다고,
다시 나에게 돌아오겠다고,
그말에 나 또한 너를 사랑한다고,

 

너와 함께할 그 순간들을 기다리는 일들은 마치
외로운 고독속에 정사와 같아
네가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너의 그 슬픈 기타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억나니

날 사랑했다고,
다시 나에게 돌아오겠다고,
그말에 나 또한 너를 사랑한다고,

 

 

 

어느날 퇴근 후의 음악감상 

 

엘튼존은 1987년, 성대결절로 성대 수술을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발라드 곡들로 유명하지만, 엘튼존은 사실 시원시원한 가성을 내지르는 로커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그에게 수술 이후 가성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단 소식은 더할나위 없이 절망적이었을테다. 하지만 그는 곧 재기했고, 훨씬 굵고 단단한 목소리를 내새워 예전처럼 종횡무진 차트를 휩쓸고 다녔다. 말년에는 양성애자 어설프게 커밍아웃했던, 위장 결혼으로 여론을 무마하려 했던 과거를 딛고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린다.

 

 

 

 

머레이 페라이어는 1990년, 악보를 넘기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상처는 계속 덧나기 시작했고, 항생제를 먹어도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엄지 손가락은 심각한 변형을 겪었고, 페라이어는 본의아니게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또한 1990년대 후반, 재기에 성공했고 2000년에 녹음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 15주나 머물렀다. 2004년에는 모든 공연을 취소할 정도로 손가락 부상이 다시 심해졌지만, 다시 재기에 성공한 그는 많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음반을 쏟아냈다.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의외로 별것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꾸준히 해내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기묘하게도, 가장 좋아하는 두 아티스트의 삶이 닮아 있어 퇴근 후 음악 듣는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엘튼존의 음악은 <Honky Chateau>앨범에 수록된 Rocket Man을 들었고, 머레이 페라이어는 최근에 발매한 브람스 헨델 변주곡이 들어간 소품집을 들었다.

 

 

 

 

 

 

 

 

 

 

생상스&거쉰 피아노 협주곡 -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1993년 실황녹음)

Saint-Saens & Gershwin Piano Concerto, Sviatislav Richter, Christoph Eschenbach, Radio-Sinfonieorchestra Stuttgart des SWR (Concert 1993)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에는 아주 긴 트럼펫 솔로가 나온다. 찬 바람에 근무하던 부대 활주로를 거닐면서 이 곡을 들었는데, 갑자기 가을 날씨가 찾아오니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원래 내가 듣던 곡은 피아니스트 스테파노 볼라니와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의 2011년 음반이다. 계속 같은 연주만 듣는것이 지겨워 새로운 연주를 찾아보는데, 생각보다 음반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녹음은 젊은 연주자들의 것.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거쉰이 이 곡을 만든 때가 1924년이니, 그 후에 수많은 협주곡들이 쏟아졌고 많은 녹음이 있음에도 그의 작곡이 외면당하는건 연주자들의 편견이 작용했을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내가 찾아낸 음반이 있었는데,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가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슈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 1993년에 녹음한 독일 레이블의 연주다. 더불어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5번도 함께 녹음 되었는데, 처음에는 연주자를 잘못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흐테르와 거쉰의 조합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정보를 찾아보니, 이 실황연주는 아주 조악한 음질의 해적반으로 녹음되어 리흐테르를 추종하는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 오고가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약간의 손질을 거쳐 좋은 음질로 복각을 했다니, 일전에 쉽게 구할 수 없는 연주들을 정갈하게 손질해 내놓은 핸슬러 레이블의 연주들이 생각났다. 그러고나선 바로구입, 아무런 일정을 잡아놓지 않은 일요일에 드디어 이 음반을 시디플레이어에 넣을 수 있었다.

 

 

 

몇 장 안되는 속지의 소개글이 좋아 불법으로(?) 번역을하여 옮겨보고자 한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레스, 클라우디오 아라우, 빌헬름 박하우스, 빌헬름 켐프, 아루트르 루빈스타인 - 20세기의 손꼽히는 명연주자들- 공식적으로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거나 심지어 약간의 녹음이라도 남겨두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에 견주어 볼 때,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가 거쉰을 연주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만한 일일 것이다. 슈베칭엔(Schwetzingen)에서 연주회가 있던 날,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선곡해 저녁 공연의 포디엄을 책임졌던 크리스토프 에셴바흐는 리흐테르의 아내와 전화통화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하고 있다. 리흐테르가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슈베칭엔(Schwetzingen)에서 연주하고 싶다며, 자신은 언제나 거쉰의 작품을 높게 평가해왔다는 말을 전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국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좀처럼 거쉰의 곡을 연주할 기회가 없었다며.

 

뒤에 이어지는 내용까지 그대로 옮기자면 조금 길어질것 같아 간단히 요약하자면, 리흐테르의 간단한 프로필과 철의 장막이 무너진 1960년대, 45살이 넘어서야 서방세계로 자유롭게 넘나들수 있었던 그가 미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추측컨데 그에게 자유롭게 리사이틀을 열며 미국을 여행할수 있었던 일은 엄청난 영감을 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거쉰의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다는 마음은 소비에트 시절에 품었다가, 자유로이 여행을 하면서 더욱 커졌을테고 말이다. 그의 나이가 여든이 넘은 1993년, 리흐테르는 드디어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무대위에 올릴수 있게 된다. 좀처럼 무게감 있는 속도로 진행되지만, 연주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깊은 타건을 통한 울림을 들려주고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리흐테르-거쉰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허물어낸다. 일전에 리흐테르 자서전을 읽다가 거쉰에 대한 언급이 있던 것이 생각나 그의 글을 찾아보았는데, 이 곡을 천천히 연주하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역시나 불법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약간의 글을 옮기자면 내용은 이렇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의 생상스 연주와 거쉰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나서의 감상인데, 거쉰이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부분만 옮겨본다. 아마 이 감상을 적은 후애 아내를 통해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작곡가 자신이 피아노를 맡고 있으니 이 연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편곡(누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템포기 지독하게 빠르다. 명인의 기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 요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작곡가 자신의 연주를 듣고 무슨말을 하겠는가"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493p.,브뤼노 몽생종, 이세욱옮김, 정원] 리흐테르의 수첩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번역자료는 1995년에 가서야 끊기는데 이 메모는 그 끝에서 두페이지를 남겨두고 기록되었다. 연주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그는 거쉰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곡가들과 다양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었으며-심지어 서울에서 정명훈의 지휘를 감상하기도 했다!- 메모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80세가 넘은 소비에트연방의 한 피아니스트가 거쉰을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쉽게 그 모습이 그려지질 않았다. 아직도 내 손에 들린 이 음반커버에 리흐테르와 거쉰의 이름은 빙탄지간과 같이 섞이지 않고있다. 그럼에도 연주를 듣다보면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이렇게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연주한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녹음된 생상스 또한 리흐테르의 색이 그대로 묻어있는데, 왠지 보물을 발견한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 볼륨을 한껏 높여 음악을 들었다. 음악도 계절감이 있는지라 찬바람이 불때면 유독 찾게되는 음악들이 있는데 슈베르트와 함께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은 나에게 따뜻한 스웨터와 같은 음악이다. 조금씩 차가워지는 바람에 마음이 헛헛하지만, 얼마전 손에 넣었던 잉그리드헤블러의 슈베르트 연주도 있고 리흐테르가 들려주는 거쉰도 있기에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반은 2010년 헨슬러(hanssler) 레이블에서 제작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8월에 수입되었다. KBS 명연주 명음반에도 소개된적 있는데, 방송은 듣지 않았지만 정만섭씨가 뭐라고 소개했을지 왠지 알것만 같다. 음반의 가격은 온라인에서 18,500원 정도. 리흐테르의 팬이라면, 거쉰을 좋아한다면 망설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취업시장에서 6개월 이상의 경력 단절은 구직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대학생활동안 쉼표를 찍고자 했던 휴학은 면접장에서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심지어는 군휴학동안에도, 복무기간 중에도 무엇을 했는지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취업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봉사활동을 하고, 자격증을 따고, 대외활동을 꾸준히 이어가야한다. 휴학 기간은 인턴쉽이나 어학연수와 같이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활동과 연결되어야 한다. 군 복무기간에도 휴가는 달콤해선 안된다. 토익과 외국어를 섭렵해야 하며 간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야간 대학이라도 지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에게 자유가 있는, 모든것이 가능한 긍정의 시대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질병과 물리적 제한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진 현대사회는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이 가득한 근대사회와는 개념이 다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억압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초긍정 사회에서 경쟁을 뚫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들이 만든 성공의 메뉴얼은 간단하다. 아프니까 청춘이어야 하고, 천 번은 흔들려야 단단해 질 수 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계발하여 자아를 완성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을거야', 그들은 다그치지 않고 따뜻한 말로 격려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하지 못함을 탓한다. 자아를 채찍질하는 현대사회의 맹점은 사람들을 구조맹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사람들은 자신이 취업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의 탓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비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업은 고용의 탄력성을 위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신규 채용보단 경력직을 뽑으려한다. 정부는 도시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개발하여 도시의 빈틈을 없앤다. 과도한 개발로 이한 부동산 과열은 살 곳은 많지만 누구나 살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정부와 기업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이룩하려 한다. 그런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가능성의 모토 아래 착취하기 가장 쉬운 부품이 된다.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회는 결코 발달한 사회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경쟁하는 세렝게티 초원의 표범의 무리에서나 관찰 가능한, 원초적인 생존법칙이다. 동물들은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 드넓은 초원에서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한다. 그들은 사냥한 먹이를 먹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잠을 자는 순간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섹스는 유희가 아닌 번식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목숨이 위협을 받는 순간에는 당장 모든것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늘어지게 하품하고, 사색에 잠기며 춤을 추거나 새들의 노랫소리를 즐길 여유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자랑한다. 끊임없이 소식이 쏟아지는 SNS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와 풍요의 초원에서 이처럼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쟁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만큼이나 흔들리고 아팠어, 그리고 너희들에게 자랑할만한 타이틀을 얻었어' 흔들리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사색에 잠기는대신 멀티태스킹에 능한 타인들의 성공사례를 자신을 위한 채찍질로 환원시킨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틀비는 멀티태스커가 되라고 외치는 자신의 고용주인 변호사에게 이렇게 답변한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I would prefer not to'. 변호사가 써내려간 문서를 끊임없이 복사해내는 필경사의 삶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노동자의 삶처럼 비극적이다. 더 비극적인건 더 이상의 멀티태스킹을 거부한 바틀비가 텅 빈 사무실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모습이다. 우리에겐 긍정의 힘을 거부할 능력이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선사한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고작해야 70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이 얇은 철학책을 또 다시 요약하고 설명하는건 불필요한 일일것이다. 집중해서 읽는다면 누구나 2-3시간이면 피로 사회를 읽을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결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바쁜 와중에 급하게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긴 책을 읽는 시간보다 더 긴 호흡을 담아 사색을 하고 행간을 읽어내며 이 책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이 선사하는 고요한 침묵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피로사회를 돌아봤으면 좋겠다.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우리는 피로한 노동계급의 소박한 저녁상을 마주한다. 풍성하지 않지만 하루에 감사할 수 있는 감자 앞에서 그들은 서로의 피로를 보듬어준다. 우리는 어떤가. 힘든 하루속에, 축 처진 어깨에 피로를 가득담은 우리는 '왜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는가'에 대해 한탄한다. 쏟아지는 긍정의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피로사회의 현대인에게 한병철은 잔잔한 공감을 유도한다. 부정의 피로에서 긍정의 피로로, 긍정의 사회에 가득찬 피로를 함께 나누며 공감할수 있는 피로로.

James Gaffigan, Luchern Symphony Orchestra, Dvorak Symphony No.6

드보르작의 6번 교향곡이 비엔나 초연에 성공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이는 당시 빈 필하모닉의 단원들이 지휘자 한스 리히터와 드보르작에 대한 가진 반감 때문이었다. 게르만족 성향이 다뉴브 왕가의 주를 이루고 있을 때 두 지휘자는 기여코 슬라브 민족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특히나, 체코를 사랑했던 민족주의 작곡가 드보르작의 새 교향곡 연주는 당시 비엔나 오케스트라나 비평가에겐 불편한 요소였을테다. 결국, 드보르작의 교향곡 연주를 위해 헌신했던 한스 리히터는 블타바 만에서 열린 6번 교향곡의 초연이 있은 3개월 후인 1881년 3월에 해임된다. 이렇게 고난을 겪던 드보르작과 그의 6번 교향곡은 1883년에 이르러서야 비엔나 초연에 성공한다. 비엔나에는 꽉 막힌 게르만족만 있지는 않았기에, 그의 비엔나 공연은 대 성공을 이뤘다. 음악 비평가 에드워드 한슬리크는 '신선하고 자연스러웠던 그의 초창기 작품들이 이제 꽃을 피운것 같다, 아름다운 관현악 연주는 간결하고 힘이 느껴지는 하나의 청동조각 같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드보르작에 호의적이지 않을것 같던 게르만 계열의 비평가들도 '슬라브 민요의 느낌이 살아있지만, 근저에는 위대한 베토벤이 살아있다!'는 식으로 에둘러 칭찬하기 시작했다. 한슬리크가 이에 동의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6번 교향곡은 그의 교향곡 작곡이 꽃을 피우기 시작할 무렵에 작곡된 곡이다. 완성도나 독창성 면에서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단골 레퍼토리를 장식하고있는 7-9번에 비하면 뒤쳐지는건 사실이지만, 6번 교향곡은 비엔나의 초연이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탄탄한 구조와 독특함이 살아있는 매력적인 교향곡이다. 평론가들이 이 곡에 대해 가장 많이 얘기하는 부분은 브람스의 교향곡과 닮은 1악장과 4악장이다. 이 부분의 소나타 형식을 확장시킨 안정적이나 주제의 등장과 변주는 브람스의 2번 교향곡과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6번 교향곡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다, 브람스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은 1,4악장과는 달리 목가적인 2악장과 춤곡 느낌이 강한 3악장은 슬라브 민요를 차용해 민속적인 느낌을 한껏 살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교향곡은 그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작곡가의 영향력과 민족적 느낌을 살린 독창성 사이에 있는 과도기적 작품이면서도 그 매력을 한껏 살린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과 함께 커플링된 '아메리카 조곡'은 원래 드보르작이 1894년, 피아노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이 조곡은 5개의 악장은 탄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반면 음악적인 요소들은 상당히 절제된 느낌을 주는데, 장식도 없고 멜로디도 단순하며 심지어는 5음계적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아마 이러한 분위기, 단순한 리듬패턴 그리고 명백한 화음구조는 드보르작이 미국 생활을 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아메리카-인디언, 아프로-아메리칸의 민속 음악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민속적인 리듬속의 아메리카 조곡은 전체적으로 슬라브 민족의 보헤미안적인 춤곡의 느낌을 강렬하게 선사한다. 이는 머나먼 타국에서도 조국을 그리워하는 보헤미안 드보르작의 마음이 담겼기 때문일테다.

 Edward Hopper, Rooms by the Sea, 1951

미국의 젊은 지휘자 제임스 가피건과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보기드문 선곡으로 장식한 앨범의 커버에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그려져있다. 아마도 이 그림은 음악가로서 정점을 달리고 있을때에도, 슬라브 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아야 했던, 조국이 그리워 떠나기 싫었지만 미국으로 향해야했던 드보르작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에드워드 호퍼는 사실주의 작가로 종종 분류되어진다. 하지만 그가 그렸던 그림들을 보면, 그가 사실보다는 존재의 고독을 그려낸 추상화가라는 느낌을 받을수 있다. 그가 1951년에 그린 바다 옆의 방(Rooms by The Sea)는 그의 그림에 늘 등장하던 사람이 없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한것처럼 보이는것도 이를 증명한다. 천성적으로 내성적이었던 그에게 미국에서의, 도시에서의 삶은 군중속의 고독과 같았을 것이다. 항상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는 듯한 그의 그림속 화자들은 그렇게 마음속의 고향을 그리며 안식을 기도한다. 제임스 가피건은 젊은피 답게 박력있고 긴장감있는 리듬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나간다. 그 속에서 드보르작이 숨겨두었던 보헤미안적 감성은 극치를 달린다. 항상 마음속은 자신의 조국, 체코가 있었던 드보르작은 성공가도를 달리며 대서양을 넘나들었을 때에도 외로웠고 고독했다. 그래서 그의 6번 교향곡은 에드워드 호퍼와 훌륭한 마리아주를 이루고,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Ivan Fischer, Budapest Festival Orchestra, Bruckner Symphony No.7
빈은 브루크너에게 호의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시골 촌뜨기이자 바그너리안인 브루크너의 음악은 비평가들의 훌륭한 사냥감에 불과했다. 당대를 주름잡던 음악평론가 한슬리크는 브루크너의 변하지 않는 작곡법에 지쳤으며,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막스 칼벡이란 평론가는 브루크너의 음악에서 '지옥의 불길이 치솟는다'고 했다. 그나마 '그의 교향곡은 가치가 없다'라고 평가한 브람스의 평가는 호의적인 편이었다. 시대와의 불협화음 때문에 브루크너는 공들여 작곡한 교향곡을 무대에 올릴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6번 교향곡의 경우 전곡 초연은 브루크너가 죽은지 3년이 지난 1899년, 말러의 독단적인 해석으로 이뤄졌다는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힘든 환경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브루크너는 이렇게 비호의적인 분위기와 쏟아지는 비난속에 동료 작곡가들에게 '어떻게든 좋으니, 좋은 방향으로 수정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없었다. 여태껏 가장 많이 연주된 브루크너의 교향곡인 7번은 열등생 브루크너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곡이다. 이 곡이 없었더라면 아마 브루크너는 수없이 수정된 자신의 악보와 함께 조용히 무덤속에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7번 교향곡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에 대한 제대로된 평가는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뤄졌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요즈음에도 중부 유럽의 고지식한 분위기는 브루크너의 전통을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죽었음에도, 브루크너의 음악은 이렇게 편견과 몰이해에 외면 당하기도 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이전시대에 발견할 수 없었던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그렸다. 그리고 바그너리안이라는 이유로 반대파에게 비판을 받았던 것에 비해 그의 스타일은 바그너와는 달랐고 개성이 넘쳤다. 악보에는 바그너 튜바나 팀파니 같이 이전의 오케스트라에서 볼 수 없었던 악기들이 그려졌고, 거대한 오케스트라는 쏟아지는 멜로디속에 화성과 조를 넘나들며 아름다움을 그렸다. 베토벤이 만들어낸 혁신위에 브루크너는 자신만의 세계를 세웠고, 고전파 교향곡의 끝을 보여주었다. 그의 교향곡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건 비단 형식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이반 피셔가 브루크너를 성자이자, 부처이고, 구루라고 표현한 것 처럼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성스럽기 그지없다. 이 앨범에 실린 7번 교향곡도 마찬가지다. 1악장의 깊고 조용한 비올라와 첼로의 트레몰로는 브루크너가 신에게 바치는 조용한 기도의 시작을 알린다. 음표는 때때로 사그라들고 소리없이 죽는다. 속삭이듯 시작하는 현악과 관악의 조용한 연주는 수도원에서 자라 그곳의 교사 겸 오르가니스트로 평생을 살았던 그의 고요한 삶을 대변한다. 2악장은 그가 존경하던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위해 그려졌지만, 신을 향하는 마음과 깊은 기도는 여전하다. 웅장하고 호전적인 3악장의 스케르초를 넘어서면 1악장을 닮은 피날레가 나온다. 수도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브루크너는 깊은 신앙속에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품었고, 이를 음악에 담아내고자 했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의 마지막 부분에선 주인공이 맹인의 손을 따라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한 번도 보지못한 사람에게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다. 맹인이 손을 떼는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려낸 주인공의 대성당은 브루크너의 교향곡과 일맥상통한다. 같은 방식으로 촌뜨기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어지러운 세상속의 많은이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전해준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거대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섬세함을 요구한다. 가령, 브루크너 교향곡의 트레이드 마크 '브루크너 휴지'에선 세밀한 표현이 중요하다. 끊임없는 현악군의 활질과 관악군의 깊은 숨소리는 영원한 잠으로 빠져드는 사람의 숨소리처럼 고요하게 죽어가야 한다. 거대한 함선의 항해에서 섬세한 조타가 어렵듯,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스러지는 장면은 오랜 연습을 통해서야만 묘사될 수 있다. 이반피셔와 25년동안 호흡한 부다페스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는 브루크너 연주에서 놀랄만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지휘자의 눈빛만 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연주자들에게 브루크너는 어렵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너무 유려해서, 스르르 흘러가는게 단점이라고 할만큼 부다페스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완벽하다. 브루크너 사이클은 오케스트라와 오랜 우정을 쌓은 이반피셔의 야심작이다. 그 출발은 화려하고도 완벽했다. 7번 교향곡이 브루크너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던 것 처럼, 이반 피셔의 연주도 그와 오케스트라의 연주 인생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길 희망한다.

 

Claudio Abbado, Lucerne Festival Orchestra, Bruckner Symphony No.9

 

아바도는 밀라노의 유력한 음악가문에서 태어났다. 앨리트 코스를 밟고 지휘자로 성장하던 아바도는 1965년,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말러 교향곡 2번을 연주하게 된다. 이 때의 성공으로 아바도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는다. 이후 1989년에는 바렌보임, 로린마젤, 무티, 오자와등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카라얀의 뒤를 잇는 베를린필 지휘자가 된다. 이처럼 아바도는 흠잡을데 없이 훌륭한 프로필을 가진 지휘자였다. 그리고 2014년 그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많은 이들이 이 훌륭한 지휘자를 애도하고, 뛰어난 업적을 칭송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이어졌던 칭찬 릴레이처럼 그의 지휘는 늘 호평을 받아오진 못했다. 베를린필 지휘자가 되고나선, 위대한 지휘자를 잇는 자리에는 어부지리로 당선됐다는 이야기가 나돌았고, 지나친 민주적 방식의 오케스트라 운영으로 기존 단원들은 탈퇴하기도 했다. 단원들은 그의 리더십에 지루함을 느꼈고, 카라얀 이후에 베를린필의 변해버린 분위기는 음반 판매고의 저하를 가져왔다. 음반 판매 수입만으로도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던 단원들은 뚜렷한 히트곡 없는 아바도의 디스코그라피에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아바도는 2002년 이후로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에서 물러났다.

 

그가 베를린필을 떠나고 만나게 된 루체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은 아바도의 마지막 실황 공연으로 남았다. 2003년부터 호흡을 맞춰오던 오케스트라는 아바도와 함께 더 많은 레퍼토리를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브루크너 9번을 커플링한 이 날의 실황은 아바도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아바도는 죽음을 예감하지 않았다. 수많은 비판과 단원들의 불만 속에서도 꾸준하게 지켜냈떤 자신만의 신념을 담아 평소처럼 지휘했다. 초저녁의 가을바람 같이, 보슬비 같이, 첫 악장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 하이팅크가 발매한 브루크너 9번은 속도감과 과장된 대비로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반면, 아바도는 사뿐사뿐하게 연주를 진행해 나갔다. 끊임없는 쏟아지는 9번 교향곡의 멜로디는 담백한 아바도의 연주로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냈다. 먹의 농담만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듯, 그는 '아바도식 작별인사'를 그려냈다.

 

빈은 브루크너에게 끝가지 호의적인 곳이 아니었다. 포퓰리즘이 가득하던 빈에서 브루크너의 음악은 브루주아적 감성에 쩌든 교향곡일뿐이었따. 성공 이후에도 그칠줄 모르는 비난 속에 8번 교향곡을 완성한 1887년부터 1896년까지, 브루크너는 10년 동안 9번 교향곡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 악장을 완성하지 못한채 죽는다. 그렇기에 그의 9번 교향곡은 수많은 수정을 거쳐 대중의 입맛을 맞췄던 기존의 교향곡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생전에 발표되지 않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는 신념을 담아낼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교향곡은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감한 관현악적 시도가 들어있었다. 평생동안 담아왔던 음악적 시도들은 그의 앞에 다가온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신에게 바치는 애절한 마음을 담아 그려졌다. 그의 죽음과 마지막 교향곡은 독일-오스트리아 낭만파의 최후를 선언할 정도로 베토벤의 양식을 발전시키고 변용하며 미래를 그려냈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신념대로 음표를 그리고, 지휘봉을 잡았다는 점에서 브루크너와 아바도는 닮았다. 아바도는 늘 자신을 둘러싼 음악세계를 넘어 피안을 그렸다. 세계적인 명성을 받는일보다, 음반을 많이 파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예술이 그려내는 깊은 아름다움을 온 몸을 다하여 표현하는 일이었다. 세속적인 일에 지쳐있던 아바도는 브루크너를 통해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그 신념과 위로를 담아 아바도는 편안한 마음으로 9번 교향곡을 지휘했을 것이다. 가장 아바도스러운 방식으로 뽑아낸 브루크너의 선율은 그렇게 많은 이들의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브루크너를 선사할것이다. 다양한 교향곡 레퍼토리가 쏟아지는 지금, 언제나 그걸 연주했던 아바도의 음반이 언급되는건, 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늘 가슴속 깊은 곳을 건드렸던 그의 지휘 때문일 것이다. 늦었지만, 진심으로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Claudio Abbado, Lucerne Festival Orchestra

 

Evgeni Koroliov, Beethoven Sonatas op.101, 106 "Hammerklavier"

예브게니 코롤리오프, 베토벤 소나타 28,29번 '함머클라비어'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는 새로운 피아노의 탄생과 맞물려있다. 19세기 초반, 피아노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포르테피아노를 대체할 건반악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빈에 위치한 슈트라이허라는 피아노 회사에 7옥타브를 넘나드는 피아노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다.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는 독일에서 탄생할 이 새 악기를 위한 메모였다. 지금은 29번 소나타에 붙은 별칭이지만 27번 소나타의 악보부터 함머클라비어란 단어가 등장한다. 두번째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작품번호 101번, 28번 소나타의 악보에는 여지껏 볼 수 없었던 4개의 덧줄이 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피아노로 연주 가능한 음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정확히 한옥타브 낮은 미를 그려놓았다. 귀가 완전히 멀어버린 베토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것을 동원하여 들리지 않는 소리를 영원한 음표로 표현해내고자 한다. 그 열망으로 베토벤은 그동안 음악사에서는 꿈꾸지도 못할, 혁신이 가득찬 작품을 만든다. 9번 교향곡은 기존의 교향곡이 넘보지 못하는 길이에, 합창까지 담아냈고, 현악사중주 14번(op.131)은 악장이 7개로 늘어났다. 32번 소나타(op.111)는 고작 두 개의 악장을 가지고 있다. 28번 소나타를 비롯하여, 한동안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질만큼 어려운 29번 소나타도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한 혁명이었다.

'Etwas lebhaft und mit der innigsten Empfindung'. 생동감이 넘치도록, 서정적인 느낌을 살려서 연주하라는, 표제음악에서나 볼수있는 지시사항이다. 28번 소나타의 첫 악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바그너는 자신의 아내 코시마에게 이 악장을 '영원의 멜로디'라고 표현했다. 악보에 그려진 세 개의 샵은, 이 소나타가 라장조로 시작할 것을 알린다. 하지만 첫 음표는 마장조의 음들이 그려져있다. 악장이 마지막에 이르러 근음이 제자리를 찾을때까지 미묘한 불안함은 차분한 분위기에서 극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러한 기법은 이미 바흐의 프렐류드나 하이든의 일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이처럼 극적인 전개를 이끌어 나가는건 베토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지는 빠른 악장의 행진에선 미약하나마 대위법적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소나타는 마지막장에 이르러 첫 악장을 상기시키는 음표를 연주한다. 이어서 나타나는 주제는 피날레를 이끌어간다. 28번 소나타는 베토벤이 확신을 가지고 그려낸 음표로 만든, 아찔한 아치를 그리며 버티고 있는 위대한 건축물이다. 28번 소나타의 아찔한 출발처럼, 베토벤의 혁신은 하이든의 그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하이든의 내림마단조 현악 사중주에서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조 바꿈이 나온다. 여기서 하이든은 악보에 자유롭게 연주하라는, 법칙에 벗어나서 연주해도 좋다는 'con licenza'를 써넣었다. 떠오른 영감을 과감하게 적용하고,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가는 하이든의 작곡법은 그를 스승으로 둔 베토벤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로 알려진 29번 소나타의 외형은 4개의 악장을 가진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소나타는 비범함으로 가득차있다. 첫 악장의 웅장한 울림은 마치 5번 교향곡의 위대한 등장을 연상케 한다. 알레그로 악장은 차분함과 긴장을 오가며 마지막까지 소나타가 아닌 한편의 교향곡을 연상케 한다. 기교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하는 스케르초 악장은 연주자에게도 기쁨을 안겨준다. 베토벤의 소나타중 가장 길고 서정적인 아다지오 악장은 활기차며 기교가 가득찬 협주곡의 첫악장과 대비되는 무한한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피날레 악장은 푸가가 가득 차 있다. 상상력이 가득한 주제의 변주와 차분함이 느껴지는 종교적 칸타빌레 테마는 피날레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이 마지막 악장의 푸가는 소나타 작곡뿐만 아니라 현악사중주를 작곡함에 있어서도 후세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베토벤은 어렸을적부터 바흐의 '평균률 클라비어'를 연주하며 푸가의 우주에 빠져들곤 했다. 바흐를 동경하고 그 무한한 우주에서 음악적 능력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베토벤과 예브게니 코롤리오프는 공통점이 있다. 17세의 나이에 코롤리오프는 모스코바에서 바흐의 '평균률 클라비어' 전곡을 연주하는 리사이틀을 열었다. 코롤리오프는 낭만주의, 현대음악등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주했지만 늘 바흐에 대한 동경을 잊지 않았다. 첫 리사이틀 이후에도 코롤리오프는 수많은 콘서트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푸가의 기법, 평균률 클라비어를 연주했다. 그의 첫 CD녹음도 '푸가의 기법'이었다. 코롤리오프의 디스코그라피와 프로필은 온통 바흐의 이름으로 가득차있다. 하지만 그가 바흐의 연주에 정통했다는건 베토벤 연주에 있어서도 믿을만한 연주가라는 것을 반증한다. 기대했던 것처럼, 코롤리오프 시리즈의 최신작 '함머클라비어'는 베토벤 연주의 정석을 보여준다. 청명하고 울림이 깊은 그의 연주에서는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던 베토벤 후기 소나타의 깊은 우주가 느껴진다. 29번 소나타는 연주하는 이에게도, 듣는이에게도 쉽사리 정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코롤리오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베토벤의 그려내는 19세기 '푸가의 기법'에 혀를 내두르고,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것이다.


Evgeni Koroliov


 

프랑스 작곡가이자 [음악의 기쁨]의 저자인 롤랑 마뉘엘은 모차르트의 환상곡 C단조(KV475)가 피아노의 모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공포에 가득찬, 두려움이 느껴지는 시작부분은 리스트 B단조 소나타의 첫음과 닮아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인생을 회상하듯 흐르는 차분한 멜로디, 쉼표와 침묵은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고뇌를 말해준다. 이어지는 알레그로 파트에선 잠시 어린 시절 행복을 맛보기라도 하듯 경쾌한 음표가 등장한다. 하지만 행복한 연주는 계속되지 않는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질정도로 한탄스러운 멜로디가 이어진다. 모차르트는 절규한다. 죽고싶지 않다고. 살고싶다고! 이렇게 건반위에서 모차르트는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을 이야기한다.

모차르트 환상곡 C단조는 늘 그의 열 네 번째 소나타와 짝을 이룬다(KV457). 이 소나타는 1784년,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20번 연속으로 자신의 콘서트를 매진으로 이끌었던 전성기 즈음에 쓰여졌던 작품이다. 이후 모차르트의 삶은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을 작곡하는 1791년까지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소나타는 자신의 비극적 삶을 직감한 모차르트가 쓴 첫번째 작품인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모차르트의 밝은 톤과는 전혀 다른 환상곡이 탄생한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슬픔이 느껴지는 이 곡들처럼, 모차르트는 성공한 작곡가의 삶을 만끽하지 못했다. 그의 끊임없는 내적 갈등과 계속되는 인생의 비극은 베토벤과도 많이 닮아있다. 실제로 그의 소나타를 듣다보면 베토벤의 정취가 연상되기도 한다.

파울 바두라-스코다가 연주한 모차르트 후기 작품집에는 이외에도 환상곡 D단조(KV. 387), 아다지오 B단조(KV.540), 피아노 소나타 D장조(KV.576)이 담겨있다. 궁핍한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작곡한 D장조 소나타를 제외한 작품들은 모두 단조이며 죽음의 이미지를 담고있는 곡들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저승사자를 목격하고 레퀴엠을 그려내던 모차르트의 모습은 비단 그 때뿐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성공한 삶을 살고 있을때 죽음의 그림자를 목격했다. 음반 한 장의 무게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건 죽음앞에 두려워하는 모차르트가 인생의 무게를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모차르트와 동향인 파울 바두라-스코다는 1991년에 이미 모차르트 소나타 사이클을 완성한 바 있다. 87세인 그는 그가 완주했던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작품들을 다시 연구하며 시대악기로 다시 연주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앨범 이전, 국내에 발매됐던 그의 슈베르트 작품집은 무려 3대의 다른 피아노로 소품 D.946을 연주했다. 에드빈 피셔를 사사했던 그의 초창기 연주들은 밸런스가 좋고, 바닥을 상승하는 부드럽운 아름다움이 특징이었다. 살아있는 전설로 자신이 녹음했던 작품들을 다시 복기하는 그의 연주에는 이제 그 아름다움과 오랜세월 경험으로 쌓은 지식이 녹아 들어가있다. 사뭇 진지하게 모차르트의 삶을 짚어보는 이 앨범은, 바두라-스코다의 연주 속에서 빛을 내고 있다. 밝고 경쾌한 작품들로 모차르트를 생각하고있는 이들에게 이 앨범을 추천하고 싶다. 이 앨범을 듣고나면, 쉽게 접했던 다른 모차르트의 작품들에서도 깊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파울 바두라-스코다의 연주대신, 유투브에서 찾은 졸탄 코치슈의 영상으로 음악을 대신한다.

Z. Kocsis - Mozart Fantasia in c minor, K. 475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러나온다. 영화를 보기 전, 나는 두 개의 아리아가 처음과 끝을 장식할 것이라 예상했다. 물론 가장 처음 흘러나온 곡과 엔딩크레딧에 깔린 곡은 아리아였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부를 달릴 때 즈음 예상치 못하게 변주가 되던 배경음악은 아리아로 돌아갔다. 다시 아리아가 흐르는 순간 나는 은연스래 영화가 마지막을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 됐다.

 

영화가 끝나고, 왜 이렇게 음악을 심어놓았을까 생각을 했다. 그리고 주인공 료타가 보여준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흡사 변주를 완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아리아로 돌아가는 배경음악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모습은 답이라고 할 게 없다. 빨대를 씹어 먹고, 가끔 생각 없는 말을 내뱉지만 늘 아들을 곁에 두고 함께하는 것도, 아들이 보고 싶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 불러내는 것도 모두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에게 혼자 있는 법을 가르치고,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료타의 모습도 결국 아버지의 변주다. 하지만 료타의 변주가 그의 아버지,  료타의 아들을 기르고 있었던 유다이와 다른 부분이 있었다면 그건 마지막 아리아일테다. 아버지로서 료타는 끊임없이 방황했다. 처음과 마지막의 아리아는 같다. 하지만 료타는 그것을 몰랐다. 아버지가 되기보다는 끊임없이 혼자가 되려고 했다. 자신이 그렇게 자랐기에 아들도 그렇게 자라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료타는 마지막 변주를 생각치 않았다. 아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료타는 방황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어간다. 엔딩크레딧에 이르러서야 흐르는 마지막 아리아는 그가 드디어 길을 찾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버지가 된다'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냥으로 바뀐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 허삼관은 피를 판다. 1년은 부지런히 일해도 벌지 못하는 큰 돈은 허삼관에게 아내를 안겨준다. 그들은 세 아들을 얻었다. 허삼관 매혈기는 그가 아들을 위해 피를 파는 내용을 그린 소설이다. 아들 일락이가 아내의 혼외정사로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을 때도, 온갖 추문으로 가족 간의 갈등이 심해졌을 때도 허삼관은 자신이 아버지임을 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피를 팔았고 그 때마다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냥으로 허기진 속을 달랬다. 끊임없는 돼지간볶음의 변주는 허삼관이라는 아버지를 나타낸다. 자식들을 무사히 자라고 혼자 집에 남은 허삼관은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위해 피를 팔기로 한다. 하지만 병원에선 늙은 그의 피가 너무 묽어 쓸모없다며 거절한다. 그는 서러움에 복 받쳐 거리를 거닐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발견한 세 아들들은 그에게 찾아간다. 네 아비가 피를 팔아 너희들을 키웠다는 어미의 말에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돼지간볶음과 황주 한 병을 선물한다.

 

허삼관의 돼지 간 볶음은 정명훈에게 슈베르트 환상곡이 된다. 그의 둘째 아들은 ECM프로듀서다. 그는 아버지에게 솔로 앨범을 녹음하자고 했다.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지휘자에게 피아노 솔로앨범이 부담이 되기도 했겠지만 그는 마다하지 않고 녹음을 진행했다. 선곡은 너무나 평범했다. 첫 솔로 앨범을 내는 마에스트로에겐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될 정도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곡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흠을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가 감동을 자아낸 건, 그가 지휘자나 피아니스트로 녹음을 하기보다 아버지로서 녹음을 했기 때문이다. 피아노 자서전이라 할 만큼 그의 선곡들에는 사연이 하나하나 담겨있다. 슈베르트 환상곡 D.899, E-flat major는 그가 큰아들의 결혼식에서 직접 연주했던 곡이라 한다. 손녀의 이름은 '루아', 포르투갈어로 '달'이다. 드뷔시의 '달빛'은 그가 손녀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다. 앨범 가득히 그는 가족을 생각했다. 아버지 정명훈이 녹음한 피아노 솔로는 그래서 흠을 잡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덧 마지막 트랙이 돌고 있을 것이다.

 

료타와 허삼관과 정명훈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지났지만 나에게 아버지는 오직 그 분 뿐이다. 아무리 가족을 힘들게 했고, 아들과는 목욕탕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물게 다녀왔고, 아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야구장엔 두 번 밖에 못 갔고, 아들과 단 둘이 딱 한번 여행을 갔다고 하지만 나는 그의 아들이다. 지난 추억들을 되새기며 나는 아버지가 어떤 연주를 했는지 생각해본다. 내가 왜 음악을 이토록 좋아하는지,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본다. 아버지는 나에게 많은 변주를 들려주셨다. 그 변주가 설령 잘못될 때도 있고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아버지가 마지막 아리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고 믿는다.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아버지의 변주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그는 나의 아버지가 된다.

 

 

 

 

 

 

 

 

 

 

스타벅스 로고에 찍혀있는 여인은 사이렌(Siren)이라 불리는 님프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이렌은 이탈리아 서부해안 사이레눔 스코풀리(Sirenum Scopuli)라는 섬에 산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띄고 독수리의 몸을 가진 이 님프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섬 주변을 지나는 선박의 선원들을 유혹했다. 섬 주변의 해류는 선박이 난파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췄다. 뿐만 아니라 님프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 그 목소리를 들은 선원들은 충동적으로 바다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호머의 신화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는 이 매혹적인 노래를 이겨내고, 섬 주변을 무사히 항해하기 위해 묘안을 짜낸다. 그는 선원들에게 자신의 몸을 단단한 기둥에 결박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나머지 선원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아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했다. 세이렌의 고혹적인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오디세우스는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결박을 풀지 못했고 무사히 섬 주변을 항해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들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을 설명하기 위해 오디세우스 신화를 활용한다. 많은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사이렌 여신의 유혹을 지혜롭게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오디세우스가 스스로 결박당하길 '선택'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꾀에 넘어갔다고 말한다.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유를 포기한 오디세우스의 모습이 우리가 자연을 이겨내기 위해 계몽을 선택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iOS7에는 itunes radio라는 기능이 있다. 특정 가수나, 곡을 검색하면 그 곡과 연관되거나 비슷한 곡들이 무작위로 재생되는 시스템이다. 랜덤으로 재생되는 곡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구매를 할 수도 있고 관심곡으로 지정해서 나중에 따로 찾아볼 수도 있다. 힘들게 비슷한 장르의 음악을, 밴드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아이튠즈 라디오가 가진 엄청난 장점이다. 또, 음악 선곡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날이면 아이튠즈 라디오에게 플레이를 맡겨도 됐으니 더할나위 없이 좋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튠즈 라디오를 듣는 내 모습이 스스로를 결박한 오디세우스의 모습과 같았다. 기분에 맞춰 음악을 고르는 일은 힘들지만, 그렇게 들은 곡들은 기억속에 오래오래 남는다는 장점이 있다. 여태까지 나는 오래된 아이팟 클래식에 담긴 160GB의 음원을 힘들게 굴려가며 그렇게 살았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카페에 앉아 있다가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물어물어 음원을 찾아내기도 했다. 늘 음악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휴대폰에 전화번호에 전화번호를 저장하면서부터 친한 친구들의 번호조자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문득, 아이튠즈 라디오에 익숙해지면 내가 어떻게 선곡을 했었는지, 어떤 기분에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 까먹게 되진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 허트로커 Heart Locker에서는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폭발물 처리 임무를 담당했던 군인이 등장한다. 오랜만에 귀환 명령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의 부탁에 마트에 시리얼을 사러간다. 스스로 무엇이든 선택했던 경험이 오랫만이었기에 그 많은 시리얼 앞에서 그는 멍하니 서있기만 한다. 결국, 그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언젠가는 나도 음반가게에 가서 수많은 음반들 앞에 저렇게 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함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길 포기하는 순간, 많은 것들을 잃게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의 탄생'이란 책에서 와타나베 히로시는 지금의 감상문화가 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들려준다. 악장간에 박수를 치지 않고, 기침소리만 내도 핀잔을 받는 그런 문화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콘서트장은 연주자가 '시끄러워 도무지 연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19세기, 부르주아의 등장으로 시작된 청중의 확대는 음악을 감상하는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 벽은 점점더 높아져 지금 우리가 공연장에서 생각하는 '매너'가 탄상했다고 한다. 연주자의 집중을 위해, 공연장을 찾은 많은 이들의 감상을 위해 모두가 침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정명훈은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함께한 베토벤 5번 피아노 협주곡 앨범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런말을 했다.

 

'청중에게는 연주자들이 즐기면서 연주하는 음악처럼 들려야 하는데 다들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특히 이 '황제' 협주곡 3악장은 솔직히 맥주 한 잔 마셔가면서 하면 좋겠어요'

 

클래식 공연장에서 학습된 감상방법은 공연장을 떠나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은연스래 클래식은 '심각하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이렌 여신의 음악에 미쳐서 바다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디세우스처럼, 우리는 고전음악을 듣기 위해 스스로를 결박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술 한잔 기울이면서 음악을 듣는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떤 연주는 숨을 죽이고 들어야 하지만, 어떤 연주는 신나게 춤을 추며 들을때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몇 백 년의 역사를 지닌 고전음악에는 정말로 다양한 레퍼토리가 있다. 그 오랜 역사속에서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췄고, 이야기도 나눴으며 사랑도 나눴을테다. 17세기에 활동했던 작곡가 코렐리는 연주할때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광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작곡간 합주협주곡의 어느 부분에서는 왜 그가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할만큼 환상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가 미쳤으니 듣는 사람도 함께 미친다면 그의 음악을 더 잘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 마주친 스타벅스 로고를 보면서 사이렌 신화가 떠올랐다. 모두들 음악을 잘 듣고 있는지 궁금했다. 무엇을 들을지 고민 할 필요 없는 음악 감상은, 기침소리도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고전음악 듣기는 과연 안녕한가 궁금하다. 더 많은 것을 얻기위한 우리의 감상법은 스스로를 결박한 오디세우스처럼 더 많은 것들을 들을 자유를 포기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해방촌에서 바라본 서울

 

화교인 우리 어머니는 서울에서 30년을 넘게 사셨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서울은 고향 땅보다도 익숙한 곳이다. 먼 곳을 여행하고 올 때마다 어머니께선 늘 이런 말을 하셨다. '매연 가득하고, 답답한 도시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서울만한 곳이 없어, 서울에 오면 편안한 기분이 들어.' 스무 살이 조금 넘어서야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처음 둥지를 틀었을 그 사글세 방, 동시통역을 위해 드나들던 동대문 상가들과 아버지가 처음가게를 얻었던 인사동, 이제는 고향보다도 더 친숙한 불광동까지. 인사동에서 동대문을 향해 걷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서울을 생각했다.

 

빌리조엘이 1976년에 발표했던 앨범 [Turnstiles]에 수록된 'New York State of Mind'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Some folks like to get away, Take a holiday from the neighbourhood
Hop a flight to Miami Beach or to Hollywood
But I'm taking a Greyhound on the Hudson River Line
I'm in a New York state of mind

 

어떤 사람들은 휴일을 맞아 이웃을 떠나 먼 곳으로 향하죠. 마이애미 비치로 혹은 할리우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뛰어들죠. 하지만 나는 나의 그레이하운드와 함께 허드슨 강변을 산책할거에요. 제 마음은 언제나 뉴욕에 있죠.

 

'New York State of Mind'은 빌리조엘의 넘버원 히트곡이 아니다. 하지만 빌리조엘은 자신의 콘서트에서 이 곡을 빼먹지 않고 부른다. 9·11테러를 추모하기 위한 콘서트에서 이 곡이 울려 퍼졌을 땐, 많은 뉴욕 사람들이 그의 노래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어떠한 이유도 이 마음을 설명 못할 것이다. 뉴욕 사람들의 마음엔 뉴욕이 있다. 잘 모르겠지만, 빌리조엘에게 뉴욕은 어머니의 서울과 같이 않을까 생각했다.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과는 조금 다른 얘기다. 어머니는 중국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서울을 사랑한다. 어려운 시절, 자신을 품어준 도시에 대한 애정은 국적을 넘나든다. 그 깊고 아련한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68년 일본의 인기 여배우인 이시다 아유미가 발표한 블루라이트 요코하마(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 Blue light yokohama)도 비슷한 맥락을 가진 노래다. 발매되자마자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일본 노래가 금지돼있던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노래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사자에상에서 요코하마행 기차표를 블루라이트행 기차표로 달라는 장면이 나온다.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는 이렇게 요코하마를 상징하는 곡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미국의 재즈밴드 핑크 마티니와 일본인 가수 사오리 유키가 함께 작업한 '1969' 앨범에 수록되기도 해서 인기를 끌었다)

 

街 の? り が とても きれい ね, ヨコハマブル? ライト? ヨコハマ
거리의 불빛이 무척 아름답 네요, 요꼬 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あなた と ふたり 幸せ よ
당신과 둘이 행복 해요

いつも の よう に 愛 の 言葉 を ヨコハマ ブル? ライト? ヨコハマ

私 に ください あなた から
언제나처럼 사랑의 말을 전해주세요. 요꼬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 い て も? い て も 小舟 の よう に
걷고 걸어도 작은 조각배처럼

私 は ゆれ て ゆれ て あなた の 胸 の 中
나는 당신의 품속에서 흔들리고 흔들려요

 
足音 だけ が つい て? る の よ ヨコハマ ブル? ライト? ヨコハマ
발소리만이 따라 와요, 요꼬 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やさしい くち づけ もう一度
부드러운 입맞춤 다시 한 번 더

 

뉴욕을 노래하는 마음보다 이 노래가 더 깊이 와 닿는 이유는 가사때문일테다. 일엽편주가 되어 둥둥 떠다녔던 서울의 구석구석을 잊지 못하는 마음은 1968년의 이시다 아유미나 어머니, 내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설렘일테다.

 

 

 

1989년에 발매된 어떤날의 2집에는 취중독백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에도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정신없는 네온이 까만 밤을 수 놓는, 나의 고향 서울을 문득 바라본다.
제법 붙은 뱃살과 번쩍이는 망또로, 누런 이를 쑤시는 나의 고향 서울
설쳐대는 자동차 끔찍한 괴성과, 난지도의 야릇한 향기가 어울린
오등신의 미인들 검정 선그라스로 엿보는, 나의 고향 서울을 문득 바라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감싸주고 키워줄, 나의 고향 서울을 힘껏 껴안고 싶다.

나의 고향 서울을 힘껏 껴안고 싶다.


 

고향이 서울인 사람들이라면 깊게 공감할수 있을 테다. 서울에서 30년의 세월을 보낸 어머니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다. 노래 제목에 '서울'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하찮은 시빗거리가 있지만, 나는 이 노래를 서울의 노래로 꼽고 싶다.

 

블루라이트 요코하마가 울려 퍼지던 1969년, 공교롭게도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불렀다. 모 치통약 광고에서 이 노래를 개사해서 불렀던 걸로 기억한다. 이 CM송의 멜로디가 익숙하게 들렸던 건 알게 모르게 서울찬가를 들었기 때문일 거다. 서울을 노래한 곡의 원조라면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가 단연 최고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작은 언덕배기에 오르면 서울시내가 시원하게 보이는 곳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서울을 떠나 살았다. 서울에 올 기회가 있으면 종종 그곳을 찾았다.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들이 가득 찬 도시의 모습은 못나 보인다. 하지만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 살으렵니다라고 외치는 이 노래의 가사가 와닿는 순간이었다. 도시에게 위로를 받는 마음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빌리조엘도, 이시다 아유미도, 패티김도, 어떤날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을테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의 마음도 같은 마음이겠지.

 

 

 

슈베르트 즉흥곡 D.899 3악장 작품번호90

 

사람들이 공연장을 채우기 시작한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공연이 시작된다. 슈베르트 즉흥곡의 첫 악장이 울려퍼지는 그 순간까지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를 찾지 못할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알렉상드르를 찾아 인사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이 주인공임이 명확해진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는 그들이 집에 도착해서야 끝이 난다.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가던 음악은 어떠한 징조도 없이 끊긴다. 침묵과 대화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화에서는 모두 네 번의 음악이 나온다. 그리고 네 번의 연주는 모두 너무나 짧게 끝난다. 페이드 아웃이 되는게 아니라 무심하게 끊겨 버린다. 아름다움이 느껴지려고 하는 순간 다시 침묵이 찾아온다. 그 순간 아무르에서 흐르는 음악들은 가장 충실한 효과음이 된다.

 

안느의 병세가 심각하지 않을 때, 그의 제자였던 알렉상드르가 노부부의 집을 찾아온다. 그는 어릴적 안느가 연주하라고 했던 바가텔(베토벤이 작곡한 연습용 곡)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타로는 곧 안느의 굳은 오른팔을 발견한다. 안느는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것이라며, 다른 얘기를 하는게 어떻느냐고 묻는다. '자네도 왔고, 멋진 막간을 즐기고 싶어'라고 말하는 안느는 알렉상드르에게 바가텔 연주를 권한다. 그렇게 시작된 멋진 막간의 연주는 또 예고 없이 끊긴다.

 

알렉상드르가 가고 난 저녁, 침상에 누운 안느의 모습 뒤로 바흐의 부조니가 울려퍼진다. 그러다 갑자기 연주가 멈춘다. 아름다운 순간은 연주를 갑자기 그만 둔 조르주의 침묵으로 마무리 된다. 그 후로 안느의 병세는 깊어만 간다. 그녀는 스스로 대소변을 가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즈음 다시 음악이 흐른다. 이번에는 안느가 피아노에 앉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슈베르트 즉흥곡의 세 번째 악장을 연주한다. 연주에 빠져들려고 할 때 조르주는 시디 플레이어를 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순간에 음악이 흐르지만, 그 음악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것은 노부부의 마지막과 닮았다. 멋진 막간을 즐기고 싶지만 그들은 더이상 아름다움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다. 마지막으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멈추게 한 건 조르주다. 더 이상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음악을 멈출 수밖에 없다. 연주가 계속될 수 없다는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에 음악은 더욱 슬펐다.

 

아무르는 메타포와 침묵의 영화다. 어떤 장면도 과하거나 지나치지 않다. 가장 슬퍼야하는 순간 음악은 끊기고 침묵만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게 노부부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지난 1년간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나는 바로 '아무르'라고 답했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사무치게 아름답고 슬펐기 때문이다. 나는 감정의 과잉이 넘쳐나는 영상들이 이끌어내는 신파적인 슬픔을 싫어한다. 문학과 영화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삶의 어떤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매체기 때문이다. 아무르에서 노부부의 삶과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잘 전달될 수 있었던 건 그 모든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침묵과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이해하게 만든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름다웠다.

 

 

 

 

알프레드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은 이래로 한 달 가까이 피아노곡만 찾아 들었다. 브렌델이 주로 언급한 작품은 베토벤 후기 소나타, 슈베르트 소나타, 리스트 소품들이다. 그의 친절한 소개와 함께 이 곡들을 다양한 버전으로 다시 듣고 있다. 피아노를 듣는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깨닫는 요즘, 그 느낌을 나누고자 몇가지 구절과 책에 나온 곡들의 영상을 올려본다.

 

밸런스, p.27-29

밸런스는 음향을 구성하는 특성입니다. 우리는 긴장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음이나 동시에 울리는 수직적 음향을 그냥 뭉뜽그려 연주하거나 벨런스를 피아노에 맡겨 버린다면, 불완전한 씨앗을 뿌리는 꼴이 됩니다. 싫증이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죠.

게다가 강약의 조절 없이 양손을 기계적으로 연주하거나 성부의 진행을 통제하지 않거나, 혹은 계속해서 소프라노와 베이스 성부의 소리를 두드러지게 뻣뻣하게 연주합니다. 이런 왼손으로 저음의 옥타브를 쳐대면 다른 음향들은 쉽사리 묻히고 말죠.

분명이 저음 부분의 소리가 큰 피아노들이 있습니다. 미국에는 수십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피아노들이 그랬지요. 이보다 더 흔한 현상은 중간 음역 아래 부분의 소리가 두드러지는 것입니다. 소프트 페달을 쓰는 경우네는 특히나 심해지죠. 하지만 진정한 피아니스트는 결함이 있는 악기의 이러한 장애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무언가 특별히 들려줄만한 매력을 품고 있을 때만 베이스가 두드러지게 해야 합니다. 피아노의 위쪽은 노래할 때 빛나야 하고, 아래쪽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위쪽보다 크게 울려야 하죠. 연주자의 양팔은 마치 서로 다른 몸에 붙어있는 것인 양 완전히 독립적이야 합니다.

벨런스는 음향을 펼쳐 보이게도 하고 우리를 음향으로부터 멀어지게도 할 수 있습니다. 또 벨른스는 음향에 색감과 특성을 부여하고 빛과 어둠을 주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베이스에 힘을 싣는 연주자보다는 소리가 바닥을 벗어나 상승하여 자유롭게 떠나닐 수 있도록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에드윈 피셔, 알프레드 코르토, 빌헬름 켐프같은 이름들이 눈앞에 떠오르는군요.

 

오케스트라, p.130-131

무대에 선 피아니스트에게 일류 오케스트라가 옆에서 귀를 열고 그의 소리에 집중하며 호흡을 맞춰주는 순간만큼 멋진 것은 없을 겁니다. 오케스트라가 지닌 음향, 다양한 음색, 폭넓은 음량, 규칙적인 리듬은 우리 피아니스트들에게 이상적인 본보기지요. 또 다른 중요한 본보기로는 인간의 음성과 노래, 그 둘의 결합을 꼽을 수 있습니다.

지휘의 거장들은 우리에게 오케스트라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는지, 또 템포의 뉘앙스 같은 것을 오케스트라에게 어떻게 암시하고 요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오케스트라풍의 피아노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바흐와 모차르트에게서도 대단히 오케스트라적인 악절들을 찾아볼 수 있고, 노년의 하이든도 <피아노 소나타 Eb장조>에서 갑자기 오케스트라적인 음향으로 기울었답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도 오케스트라적인 경향을 분명하게 보이는 곡들이 있습니다. <피아노 소나타a단조, KV310>의 1악장은 교향곡적인 색채가 짙고, 2악장에서는 극적인 중간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아름다운 곡조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3악장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한 관악기곡으로 볼 수 있지요.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또 대부분의 피아노 소나타들도 오케스트라적인 음향을 품고 있습니다. 리스트도 일찍부터 관현악곡의 음향을 피아노로 옮겨 심었지요. 그리고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억눌린 비르투오소에게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내고 피아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했답니다.

 

 

알프레드 브렌델, 슈베르트 소나타 D.899, 3악장

노년의 알프레드 브렌델이 슈베르트 소나타를 연주하는 영상. 모든 것을 피아노에 맡긴 것처럼 연주하는 이 영상은 브렌델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백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연주.

 

 

폴루이스, 슈베르트 소나타, D.940, 4악장

알프레드 브렌델이 도이치그라모폰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빛나는 피아니스트로 뽑은 폴 루이스. 그가 이모겐 쿠퍼와 함께 연주한 슈베르트 환상곡. 긴 연주만큼이나 풍부한 음표가 담긴 아름다운 환상곡. 끝가지 들어보길 권유.

 

빌헬름 켐프,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3악장

'밸런스' 파트에서 알프렌드 브렌델이 언급했던 빌헬름 캠프. 그가 연주한 베토벤 소나타 17번 3악장.

 

정명훈의 오랜 친구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모리스 라벨의 스테디 셀러 '라 발스' 연주 실황. 

 

 

모리스 라벨

 

중학교때 읽었던 소설에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가 흐르는 장면이 있었다. 궁금한 나머지 들었던 음악은 신비로움이 가득했다. 너른 잔디가 인상적인 야외무대에서 서서히 울려퍼지는 볼레로의 연주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곳에서 공연을 봤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내가 두번째로 구매한 클래식 음반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프로코피예프, 라벨 작품집이었다. 무얼 들어야 하고 사야할지 몰랐던 그때, Y선배의 추천으로 덥썩 집었던 음반이다. 구매 당시에는 요란하고 난삽했던 음표들이 어지러워 두 번 정도 듣고 시디장에 넣어두었다. 프로코피예프에 빠져있을때 1-3번 트랙만 주구장창 틀었던 적이 있었으나 라벨은 논외였다. 별로 관심이 가질 않았다.

문득,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작품이 듣고싶어졌다. 딱히 계기가 있었던건 아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라벨이 떠오른것이다. 모리스 라벨이 듣고싶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풍월당에서 나는 좋은 음반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알렉상드르 타로의 프랑스 작곡가 작품 연주 모음집이었다. 그리고 포근한 타로의 연주로 나는 라벨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집에와서 라벨의 작품들을 더 찾아보다 문득 시디장에 있는 앨범을 발견했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이 담긴 그 앨범이었다. 처음 시디를 열어보는 마음으로 라벨을 플레이했다. 당분간은 모리스 라벨에 빠져들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소설의 첫 문장이 이리도 아름다울수 있는가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설국의 첫문장은 불과 몇달전만에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었다. '이상한 소리'라는 일본 단편문학 선집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후 구입했지만, 몇달째 읽지 못하고 있었다. 얇은 책이었지만, 이상하게 페이지를 넘길수가 없었다. 이렇게 지루한 소설이 있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책상에 있는 설국이 읽고 싶어졌다. 어젯밤이었다. 잠자리에 들기전, 오랜만에 열어본 책에서 나는 첫 문장이 주는 아름다움을 깊게 느꼈다. 그 인상이 쉽게 지워지질 않아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다음날 일과가 끝난후, 나는 한 시간만에 '설국'을 읽어버렸다.

얼마전 다시 본 '비포 선셋'이 생각났다. 수줍고 겸손한 일본판 '비포선셋'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그려내는 일본의 설국이 마음속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모든것은 때가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자연스럽고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안들었던 음반과 안읽혔던 책이 하루아침에 깊은 감동을 전한것처럼 말이다. 사실 갑작스럽다고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라벨을 듣고, 설국을 읽을수 있었던건 언젠가 꼽아둔 음반과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꾸준히 듣고, 읽었기에 다시 그것들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진심으로 즐길수 있게 된것이다.

 

이건 어느순간 양파와 피망을 즐겨먹는일과 같은일이다. 마음을 열어두고 꾸준히 때를 기다리다보면 가장 좋은 때가 올것이다. 중요한건 그 순간을 놓치지않는 것이다. 꾸준히 먹고, 마시고, 듣고, 읽고, 달려야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