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쫓아내지 않겠다는 호의

 

신문기자 홍정수의 커피이야기

조원진 듣고 쓰다

 


일본어로 잠복해 감시한다는 뜻의 하리꼬미는 신입기자들의 통과 의례인데, 지정된 구역의 경찰서를 돌며 각종 사건사고를 수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정을 넘어선 순간에도 2시간 간격으로 사건보고를 해야 하는, ‘특이사항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찾아내야 하는 투쟁의 연속이다. 쪽잠이라도 자기위해 경찰서 구석에 샌드위치처럼 쌓여 쓰레기꼴로 자곤했다는 일화는 하리꼬미를 겪은 기자들의 수많은 무용담중 하나다. 추워서 잉크가 안 나왔다면 과장일까, D일보 신입기자 홍정수가 하리꼬미를 돌던 때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있던 겨울이었다. 경찰서와 경찰서를 오고가는 택시 안에서 우는 일조차 사치였기에, 커피 한 잔 곁에 둘 여유도 없는 절박한 날이 연속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세상 다 싫은 사람들에게 안부를 여쭙는 일이라고 말하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어르고 달래기도하고, 바짓가랑일 붙잡고 떼를 써 봐도 마땅한 보고 거리를 찾을 수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다가오는 나와바리 보고를 앞둔 신입기자의 절망감은 깜깜한 새벽과 다름없었다. “커피나 한 잔 드릴까요.” 그래서 이 한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당신을 쫓아내지 않겠다는 호의가 담겨있는 한 마디였기 때문이다. 진귀한 얘기는 애초에 없었고, 카더라 소식과 왕년에 그랬다는 얘기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홀짝이는 커피 한 잔은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노트북과 녹음기처럼 기자에게 커피는 취재도구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혹독한 하리꼬미의 끝에서 본격적인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정치부로 자리를 옮겨 기자생활을 시작했을 때, 쉬더라도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들으라고 선배들은 쉼 없이 얘기했다. “커피나 한 잔 하시죠.” 그녀는 다시 호의를 구하기 위해 취재원들을 만나러 다녔다. 커피 한 잔의 낭만은 가물기만 했다.

 

다시 낭만을 한 움큼 덜어내어, 단골카페의 자리도 취재의 연장선상에 둘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든 기사를 송고할 수 있는 와이파이가 필요했고, 노트북과 휴대폰을 충전시킬 수 있는 콘센트가 자리마다 있어야 했다. 취재원과 통화할 때, 방해가 되지 않는 배경음악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사옥을 떠난 탐사기획팀 기자에게 도처에 널린 스타벅스는 훌륭한 사무실이었다. 고소한 두유가 쌉싸름한 커피 맛을 감싸주어 좋았다고, 삭막한 사무실이 아니라 카페라서 다행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물론 스타벅스가 일을 위한 커피가 아닌 진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종로와 광화문, 을지로와 다동을 걷다 걸어 다동 커피를 만나게 되었다. 모든 음료는 4천원,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다방 같은 곳에서 그녀는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가볍게 차 한 잔을 마시는 기분으로, 숭늉같이 구수한 예가체프 커피를 마셨던 다동커피집은 임시사무실과 휴식의 공간 그 어딘가에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요, 대신 차를 마시죠.” 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스팅의 노래는 일의 굴레에서 벗어난 커피를 꿈꾸는 홍정수의 이상향을 대변한다. 차를 마시는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내 입맛에 맞는 차를 고르고, 뜨거운 물에 천천히 우려 향과 시간을 즐기는 고매한 시간까지. 커피와 차를 마시는 일 만이라도 내 취향에 맞출 수 있다면 살만한 인생이 아닌가라고, 다도와 취향에 대해 그녀는 얘기한다. 다동커피집의 커피의 마일드 커피는 마치 한 잔의 차와 같다. 잔의 바닥이 보이는 연한 커피지만, 맛과 향은 그 어떤 차보다도 훌륭하다. 못 느끼는 게 아니라 안 느낀 것이었다고, 잔 위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커피향을 맡으며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된 일이 참 기쁘다고 그녀는 말한다.

 

바람에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흔들린다. 흔들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쉬는 날이면 잠깐의 시간이라도 베란다에서의 시간을 즐기려고 한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언젠가는 집에서도 다동커피집에서 마신 커피처럼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일이라고 홍정수는 말한다. 다도를 하듯 물을 끓이고, 커피를 갈며 향을 즐기고, 한 잔을 마시는 모든 순간까지 커피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직도 그녀는 팔 할의 커피를 국회 공보실에서, 시청 기자실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마신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날이 있다면,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어 디톡스를 기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에게 커피는 좋아하고 싶은 대상이다. 취재를 위해 마셔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카페인을 위해 들이킬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온전히 나의 것

으로 만들기 위한 한 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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