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키즈, 서울을 마시다

 

패션디자이너 최태순의 커피이야기

조원진 듣고 쓰다

 

세련된 재단을 뽐내는 양장처럼, 도시는 빈틈이 없었다. 정방형의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에는 7층짜리 상가가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산책할 공원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상가에 있는 학원에 갈 수 있었고, 출출함을 달래주었던 편의점과 마트도 엘리베이터를 따라 오르내리면 몇 걸음에 닿을 수 있었다. 서울시 주택 안정을 위한 후보지로 오래전부터 잡음이 끊이질 않던, ‘광주대단지’, ‘남단 녹지는 고도성장 서울의 바통을 물려받아 성공한 도시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1987년생이었던 최태순은 신도시의 성장과 함께한 자신과 친구들을 분당 키즈라고 불렀다.

 

유토피아 분당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하지만 바둑판처럼 지루하게 뻗은 그곳의 거리에는 낭만이 없었다. 그래서 분당 키즈들은 높이 솟은 고층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길게 뻗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빨간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한강을 건너면 남산터널을 만났고, 가장 첫 번째 정류장에 내리면 명동 거리에 닿을 수 있었다. 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과 또 다른 기착지었던 코엑스에서 쇼핑을 하는 일은 분당 키즈들의 일탈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인생의 첫 커피도 코엑스에 갓 문을 연 스타벅스에서 마신 한 잔이었다. 고등학교 선배를 쫓아 어지러운 메뉴판을 마주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고 그는 그 때를 회상한다. ‘공부 열심히 하면 서울에서 이렇게 거닐 수 있을거야하며 선배는 여기저기 그를 끌고 다녔지만, 그 한 잔을 주문하고 마셨던 순간만이 또렷하게 생각나는 것이다.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당연히 미디움이라고 말해야 하듯, 커피도 자연스럽게 주문하고 싶었어요.”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그래서 내가 마실 커피 한 잔 주문하지 못했다는 그 날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이 가능할 줄 알았던 분당키즈에게, 서울의 커피는 세상이 녹록치 않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후 어렵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종로와 을지로 골목을 누비면서, 그는 신도시 분당과는 사뭇 다른 오래된 도시의 매력에 빠졌다. 전공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원단공장을 찾아다니고, 계획되지 않은 골목의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면서 서울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세련되고 깨끗한 미감을 가졌지만, 부족함이 있다고. 20년을 분당에서 살아온 최태순의 모습은 그가 제출한 과제와도 닮아 있었고, 교수님이 적어두었던 짧은 비평은 그에게 부끄러움과 동시에 끊임없는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가 콤플렉스를 벗어내고자 서울의 가지 않은 골목을 찾아 더 많이 걷게 된 이유다.

 

서울에 자취를 하던 때, 산책을 하다 우연히 카페에 들어가 마신 한 잔의 예가체프 커피는 그래서 더 인상 깊었을지도 모른다. 스타벅스의 부끄러움을 뒤로 한 채 얼음이 자글자글한 커피빈의 커피가 담배엔 제격이라며 그 시절의 유행을 좇다가, 처음으로 한 잔의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조금 이르게 스페셜티 커피를 취급했던 나무사이로의 커피를 만난 2008년의 일이었다. 바리스타들이 보여주는 커피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패션디자이너들의 작업과 같았다. 그렇기에 나무사이로의 그 한 잔을 비롯해 도시에서 찾은 기쁨과 위로였던 커피는 그가 서울에 대해 가진 가장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 때부터 취향에 맞는 커피를 찾는 일은 통제되지 않은 어떤 것을 좇는 꿈을 꾸는 그에게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졸업 후 장교로 군대에서 복무했을 때에도, 의상 디자이너가 되어 강남의 삭막한 도로를 따라 출퇴근을 할 때도 고즈넉한 한옥으로 자리를 옮긴 나무사이로를 찾았고, 틈 날 때마다 커피에 대한 책을 찾아 읽으며 깊이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졸업 후 취직을 한 곳은 청담동에 있는 한 의류 회사였다. 바둑판 같은 분당 도시 설계가 있기 전부터, 그보다 더 세련되고 정제된 모습으로 자라난 빌딩 숲 사이로 출근을 하게 된 것이다. 업무와 업무 사이, 피로에 젖어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옥상카페가 전부인 곳에서 그는 다시금 분당키즈의 삶을 떠올린다고 한다. 한 모금 들이킨 그 옥상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복잡 다단한 쓴맛이 가득했다. 당신이 찾던 커피와는 사뭇 다른 맛이지 않느냐고, 이렇게나 쌉싸름한 커피가 마음에 드냐고 묻자 그는 타협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택했기에 제단된 양장처럼 빈틈이 없는 도시의 삶 속에서, 통제되지 않은 어떤 것을 좇는 꿈을 꿀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물론 회사에서 마시는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가 일상의 전부는 아니다. 아내의 취향을 따라 고소하고 깊은 맛의 원두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하는, 신혼집에서의 커피 또한 그에게는 익숙한 일상이다. 드르륵 드르륵 핸드밀로 커피를 갈고, 알맞은 온도를 찾아 물을 끓인다. 다도를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따르고 한 잔의 커피를 내리면 도시의 삶에 지친 피로가 풀린다. 차분하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에 신혼집에 방문한 장모님은 참 좋은 사위를 두었다고 칭찬을 했고, 출근길에 건낸 아이스 커피에 아내의 미소도 마주할 수 있었다. 커피 한 잔에 멋진 사위노릇도 하고 지친 아내에게 위로도 건낼 수 있으니 이만한 일이 어디있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주말이 돌아오면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그리운 그 골목길을 따라 서울의 카페들을 돌아다닌다. 시시각각 변하는 한 잔의 커피처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양한 정체성을 찾아다니고자 한다. 서울 살이 이제야 10, 그는 아직도 벗어던지고 싶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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