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머레이슨은 27살에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간질을 고치기 위해 정신외과 수술을 받는다. 이는 정신분열증이나 간질등의 뇌질환에 대해서 뇌의 일부를 잘라내는 '정신 외과'가 유행했던 60년 전의 일이다. 뇌의 측두엽을 일부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헨리는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간질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수술전 기억을 제외한 그 어떤 장기기억도 해내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이라는 책은 수술후 평생의 삶을 신경외과와 관련된 실험에 헌신했던 헨리머레이슨의 평전이다. 30초가 넘어가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헨리는 측두엽과 해마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데 큰 기여를 했고, 그 밖에도 뇌과학에 엄청난 발전을 도왔다. 문득 단기기억으로 가득찬 인생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하는 의문속에 책장을 넘기다가, 저자 수잰 코킨이 핸리 머레이슨의 삶을 유추해보는 짧은 구절을 발견하고 숨이 멎을듯한 먹먹함이 찾아왔다.

'막강한 기억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오직 현재시제만이 존재하는 시간'에 산다면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고 살수 있을까, '장기기억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두렵지만, 그럼에도 인생을 지금 이 순간으로, 30초의 경계선에서 완성되는 단순한 세계를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하고 생각하는 그녀의 말에 인생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생각하며 살짝 눈물을 흘렸다. 일부분만을 인용할까 하다가 이 부분만큼은 전체를 옮겨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있다면 일독을, 더 여유가 있다면 이 책을 사서 읽어보길 권한다.

 

-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수잰 코킨, 알마

P.128-130

단기기억에만 의존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헨리가 겪은 일은 틀림없는 비극이지만 정작 헨리 자신은 좀처럼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헤매고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헨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을 살았다. 수술을 받은 그날부터 처음 만나는 모든이가 그에게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라도 열린 마음과 신뢰로 대했다. 그는 고교 동창생들이 기억하는 조용하고 예의바른 헨리의 온화하고 상냥한 성품을 잃지 않았다. 우리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묻거나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야 하며 남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자신의 상화도 충분히 인식했다. 헨리는 1966년 마흔 살에 MIT 임상 연구센터를 처음 방문했다. 여행가방을 누가 챙겨주었냐는 질문에 그는 간단히 답했다. "어머니였을 겁니다. 그런 일은 항상 어머니가 하시니까요."

헨리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붙들게 되는 정신적인 닻, 그러니까 때로는 부담이 될 수 있는 애착이나 집착같은 것이 없었다. 장기기억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인것은 맞지만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살면서 겪었던 고통, 처참했던 실패와 정신적 충격이나 골치 아픈 문제에서 헤어나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이 무거운 쇠사슬이 되어 우리를 스스로 만들어 낸 정체성 속에칭칭 동여맨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 않은가?

옛 기억에 꽁꽁 싸여 '지금 여기'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불교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이 우리가 겪는 고통 대부분이 특히나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 속에 살면서 만들어내는 자기 안의 생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지난 시간과 사건을 재생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를 되뇌면서 불안감의 수렁에 빠져든다. 우리가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명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들숨과 날숨 혹은 특정한 신체 부위에 의식을 집중하거나 하나의 주문을 반복해서 왼다. 명상은 우리의 의식이 시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훈련하는 방법이다. 막강한 기억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오직 현재시제만이 존재하는 시간에 거하기 위해서다. 현재에 집중하는 수련에 오랜 시간을 바치는 명상자들도 있다. 헨리로서는 원치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많은 부분이 장기 기억과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계획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면, 헨리가 어떻게 상대적으로 스트레스 없는 삶을 누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거에 대한 회고나 미래에 대한 추측에 얽매이지 않는다. 장기기억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두렵지만, 그럼에도 인생을 지금 이 순간으로, 30초의 경계선에서 완성되는 단순한 세계를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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