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취업시장에서 6개월 이상의 경력 단절은 구직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대학생활동안 쉼표를 찍고자 했던 휴학은 면접장에서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심지어는 군휴학동안에도, 복무기간 중에도 무엇을 했는지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취업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봉사활동을 하고, 자격증을 따고, 대외활동을 꾸준히 이어가야한다. 휴학 기간은 인턴쉽이나 어학연수와 같이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활동과 연결되어야 한다. 군 복무기간에도 휴가는 달콤해선 안된다. 토익과 외국어를 섭렵해야 하며 간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야간 대학이라도 지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에게 자유가 있는, 모든것이 가능한 긍정의 시대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질병과 물리적 제한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진 현대사회는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이 가득한 근대사회와는 개념이 다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억압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초긍정 사회에서 경쟁을 뚫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들이 만든 성공의 메뉴얼은 간단하다. 아프니까 청춘이어야 하고, 천 번은 흔들려야 단단해 질 수 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계발하여 자아를 완성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을거야', 그들은 다그치지 않고 따뜻한 말로 격려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하지 못함을 탓한다. 자아를 채찍질하는 현대사회의 맹점은 사람들을 구조맹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사람들은 자신이 취업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의 탓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비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업은 고용의 탄력성을 위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신규 채용보단 경력직을 뽑으려한다. 정부는 도시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개발하여 도시의 빈틈을 없앤다. 과도한 개발로 이한 부동산 과열은 살 곳은 많지만 누구나 살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정부와 기업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이룩하려 한다. 그런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가능성의 모토 아래 착취하기 가장 쉬운 부품이 된다.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회는 결코 발달한 사회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경쟁하는 세렝게티 초원의 표범의 무리에서나 관찰 가능한, 원초적인 생존법칙이다. 동물들은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 드넓은 초원에서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한다. 그들은 사냥한 먹이를 먹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잠을 자는 순간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섹스는 유희가 아닌 번식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목숨이 위협을 받는 순간에는 당장 모든것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늘어지게 하품하고, 사색에 잠기며 춤을 추거나 새들의 노랫소리를 즐길 여유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자랑한다. 끊임없이 소식이 쏟아지는 SNS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와 풍요의 초원에서 이처럼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쟁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만큼이나 흔들리고 아팠어, 그리고 너희들에게 자랑할만한 타이틀을 얻었어' 흔들리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사색에 잠기는대신 멀티태스킹에 능한 타인들의 성공사례를 자신을 위한 채찍질로 환원시킨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틀비는 멀티태스커가 되라고 외치는 자신의 고용주인 변호사에게 이렇게 답변한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I would prefer not to'. 변호사가 써내려간 문서를 끊임없이 복사해내는 필경사의 삶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노동자의 삶처럼 비극적이다. 더 비극적인건 더 이상의 멀티태스킹을 거부한 바틀비가 텅 빈 사무실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모습이다. 우리에겐 긍정의 힘을 거부할 능력이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선사한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고작해야 70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이 얇은 철학책을 또 다시 요약하고 설명하는건 불필요한 일일것이다. 집중해서 읽는다면 누구나 2-3시간이면 피로 사회를 읽을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결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바쁜 와중에 급하게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긴 책을 읽는 시간보다 더 긴 호흡을 담아 사색을 하고 행간을 읽어내며 이 책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이 선사하는 고요한 침묵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피로사회를 돌아봤으면 좋겠다.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우리는 피로한 노동계급의 소박한 저녁상을 마주한다. 풍성하지 않지만 하루에 감사할 수 있는 감자 앞에서 그들은 서로의 피로를 보듬어준다. 우리는 어떤가. 힘든 하루속에, 축 처진 어깨에 피로를 가득담은 우리는 '왜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는가'에 대해 한탄한다. 쏟아지는 긍정의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피로사회의 현대인에게 한병철은 잔잔한 공감을 유도한다. 부정의 피로에서 긍정의 피로로, 긍정의 사회에 가득찬 피로를 함께 나누며 공감할수 있는 피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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