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an Fischer, Budapest Festival Orchestra, Bruckner Symphony No.7
빈은 브루크너에게 호의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시골 촌뜨기이자 바그너리안인 브루크너의 음악은 비평가들의 훌륭한 사냥감에 불과했다. 당대를 주름잡던 음악평론가 한슬리크는 브루크너의 변하지 않는 작곡법에 지쳤으며,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막스 칼벡이란 평론가는 브루크너의 음악에서 '지옥의 불길이 치솟는다'고 했다. 그나마 '그의 교향곡은 가치가 없다'라고 평가한 브람스의 평가는 호의적인 편이었다. 시대와의 불협화음 때문에 브루크너는 공들여 작곡한 교향곡을 무대에 올릴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6번 교향곡의 경우 전곡 초연은 브루크너가 죽은지 3년이 지난 1899년, 말러의 독단적인 해석으로 이뤄졌다는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힘든 환경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브루크너는 이렇게 비호의적인 분위기와 쏟아지는 비난속에 동료 작곡가들에게 '어떻게든 좋으니, 좋은 방향으로 수정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없었다. 여태껏 가장 많이 연주된 브루크너의 교향곡인 7번은 열등생 브루크너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곡이다. 이 곡이 없었더라면 아마 브루크너는 수없이 수정된 자신의 악보와 함께 조용히 무덤속에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7번 교향곡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에 대한 제대로된 평가는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뤄졌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요즈음에도 중부 유럽의 고지식한 분위기는 브루크너의 전통을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죽었음에도, 브루크너의 음악은 이렇게 편견과 몰이해에 외면 당하기도 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이전시대에 발견할 수 없었던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그렸다. 그리고 바그너리안이라는 이유로 반대파에게 비판을 받았던 것에 비해 그의 스타일은 바그너와는 달랐고 개성이 넘쳤다. 악보에는 바그너 튜바나 팀파니 같이 이전의 오케스트라에서 볼 수 없었던 악기들이 그려졌고, 거대한 오케스트라는 쏟아지는 멜로디속에 화성과 조를 넘나들며 아름다움을 그렸다. 베토벤이 만들어낸 혁신위에 브루크너는 자신만의 세계를 세웠고, 고전파 교향곡의 끝을 보여주었다. 그의 교향곡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건 비단 형식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이반 피셔가 브루크너를 성자이자, 부처이고, 구루라고 표현한 것 처럼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성스럽기 그지없다. 이 앨범에 실린 7번 교향곡도 마찬가지다. 1악장의 깊고 조용한 비올라와 첼로의 트레몰로는 브루크너가 신에게 바치는 조용한 기도의 시작을 알린다. 음표는 때때로 사그라들고 소리없이 죽는다. 속삭이듯 시작하는 현악과 관악의 조용한 연주는 수도원에서 자라 그곳의 교사 겸 오르가니스트로 평생을 살았던 그의 고요한 삶을 대변한다. 2악장은 그가 존경하던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위해 그려졌지만, 신을 향하는 마음과 깊은 기도는 여전하다. 웅장하고 호전적인 3악장의 스케르초를 넘어서면 1악장을 닮은 피날레가 나온다. 수도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브루크너는 깊은 신앙속에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품었고, 이를 음악에 담아내고자 했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의 마지막 부분에선 주인공이 맹인의 손을 따라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한 번도 보지못한 사람에게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다. 맹인이 손을 떼는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려낸 주인공의 대성당은 브루크너의 교향곡과 일맥상통한다. 같은 방식으로 촌뜨기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어지러운 세상속의 많은이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전해준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거대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섬세함을 요구한다. 가령, 브루크너 교향곡의 트레이드 마크 '브루크너 휴지'에선 세밀한 표현이 중요하다. 끊임없는 현악군의 활질과 관악군의 깊은 숨소리는 영원한 잠으로 빠져드는 사람의 숨소리처럼 고요하게 죽어가야 한다. 거대한 함선의 항해에서 섬세한 조타가 어렵듯,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스러지는 장면은 오랜 연습을 통해서야만 묘사될 수 있다. 이반피셔와 25년동안 호흡한 부다페스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는 브루크너 연주에서 놀랄만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지휘자의 눈빛만 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연주자들에게 브루크너는 어렵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너무 유려해서, 스르르 흘러가는게 단점이라고 할만큼 부다페스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완벽하다. 브루크너 사이클은 오케스트라와 오랜 우정을 쌓은 이반피셔의 야심작이다. 그 출발은 화려하고도 완벽했다. 7번 교향곡이 브루크너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던 것 처럼, 이반 피셔의 연주도 그와 오케스트라의 연주 인생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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