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학비는 학교 근처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해결했다. 아버지의 반대로 못다녔던 교회를 나간것도 그때다. 학교 담임 목사님은 내가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졸업식때였다. 대학에 무사히 합격하고 담임목사를 만났고, 교회를 들러 장로님께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 때 나는 몇 권의 자기계발서와 성공스토리를 담은 책 그리고 종교서적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과 함께 더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네가 더 성공을 하려면 앞으로도 교회를 잘 다녀야 한다. 실력과 권력을 겸비한 사람들은 다들 기독교인이거든. 거기서 인맥을 쌓는거야. 인생의 큰 도움이 될거다.'

얼굴이 붉어질정도로 부끄럽고 화가났지만, 그간의 정이 있어서 적당히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물받은 책들도 절반정도는 읽었다. 인생의 멘토라 되시길 원했던 사람들의 정성스런 편지가 가득했던 그 책들은, 그 이후로 부끄럽게 내 책장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알고나서, 언젠가는 꼭 이 책들을 다 팔아버리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상급으로 보관된 그 책들을 한아름들고 중고서점을 찾았다. 5만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책들중에는, 성접대에 연루됐다는 기사로 시끄러워진 H씨의 책도 있었다.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그 사람의 자서전을 읽었다는게 부끄러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보문고에 들렀다. 모아둔 적립금과 책을 판 돈을 합쳐 러시아 소설 단편선을 사고 두 장의 음반을 샀다. 보광동은 교보문고에서 30분, 헬카페에 들러 새로 산 음반을 들었다. 존 엘리엇 가드너가 지휘하는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 연주, 베토벤 교향곡 5번과 7번이었다. 마지막 5번을 들으면서 인생의 멘토들이 생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성공하고자 교회를 다녔더라면 난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남은 돈은 월급 조금 보태 생두를 사기로 결정했다. 1년전 상자에 넣어두고 테이프 꽁꽁 싸매둔 그것들을 꺼냈다. 콩을 볶고, 자전거도 타고, 노점도 열고 그랬던 옛날 일들이 생각나 조금 울컥했다. 다시 볶을수밖에 없는 운명이구나. 볶고 마시고, 읽고 쓰고 즐기고. 그게 나의 운명이구나 싶었다.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은 나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다. 불편하기 꽂혀있던 책장의 책들은 가드너의 베토벤 교향곡으로 변했고 러시아 단편선으로 변했고 커피 한 잔이 되었다. 성공은 무슨. 그냥 좋아하는거 할수있는만큼 최대한 즐기다 사는게 사는거지. 그러다보면 어찌어찌 살게되겠지, 인생 뭐 별거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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