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 타, 한 타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프리카 여행기의 연재가 다시 시작된다. 생업과 학업에 빠져 무책임하게 미뤄두었던 여행기를 다시 무책임하게 이어나가려고 한다. 걱정되는 건, 이전에 써놓았던 여행기들이 맥락없이 이어지지 못할것 같다는 두려움 밖에 없다. 그래도 어쩌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응?)

나이로비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바라본 도심 전경


도심까지 어찌어찌 흘러나온 김에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차가운 도시 남&녀들 답게 나이로비 시내에서 가장 도시적인 스타일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을 들렀고, 큰 마트에 들러 필요한 식료품을 샀다. 저녁에는 매번 우리의 아침과 저녁을 신경써주시는 리라 이모네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공수해온 음식들로 볶음밥을 만들고 한복을 입었다. 잊지못할 2009년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었다.

나이로비 시내는 생각보다 번잡했다. 커다란 건물도 많았고, 바쁜 도시의 모습은 다른 나라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매연만큼이나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과, 수 많은 사람들 때문에 푸르른 케냐의 자연 따위는 쉽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시내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고,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머물던 카하와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건물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화려하고 큰 건물들은 관공서이다. 거기 앞엔 값비싼 외제 승용차들이 세워져있고, 정장을 차려입은 차가운 공무원들이 드나들고 있다.

도심의 건물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화려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전통과 과거를 잊은채, 그저 차갑게 도시를 체워갈 뿐이다. 나이로비도 똑같은 도시에 불과했다.

다만, 위풍당당하게 무단횡단을 할 수 있다는 것 만큼은 정겨웠다. 신호등,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람들도 엄청 많고, 자동차도 엄청 많았다. 우리는 모두 짐가방을 앞으로 들었고, 서로 길을 잃지 않도록 확인했다.

관광객을 위한 건물은 철저하다. 나이로비에서는 훌륭하게 지어진 호텔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준이는 복잡한 도심을 잘도 돌아다닌다. 나도 서울에선, 똑같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심답게 많은 팻말이 살아있었다. 아마도 수 많은 경찰 덕분일 것이다. 대부분의 팻말은 이렇게 유럽의 그것처럼 만들어졌다. 영국의 식민지배 영향이 여지없이 드러난 모습이다.

대형 광고판, 멋들어진 레스토랑,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케냐여행 2주차인 촌놈에게는 아직 익숙치 않은 모습이다.

대부분은 케냐사람이고 간혹 백인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는데, 단 3명의 아시아계 사람과 1명의 한국 사람만을 만났을 뿐이다.

복잡한 도심을 지나 점심 먹을 곳에 도착했다. 나이로비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이다. Sunford 레스토랑이고, fish&chips를 파는 곳이다. 영국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생긴듯 싶다. 지금은 다른 어떤 패스트푸드 음식점보다 나이로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신기하게도 나이로비 시내에는 스타벅스나 맥도날드가 없었다. 아이러닉한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자부심과, 강력한 유럽 문화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잠시 바라본 시내의 모습만 봐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식당은 요렇게 생겼다. 맞은편에 앉은 선미누나를 찍었다. 신기해 하는 표정이다.

오래걸어 둘다 지쳤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1층은 사람이 너무 많아 2층으로 올라왔다. 점심시간을 살짝 빗겨나가 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많았다. 이 식당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음식을 앞에서 주문하면 튀긴 닭과 감자를 받아가는 그런식이다. 사진을 찍는것에 다들 민감한터라 제대로 찍지를 못하였다.

피카나(Picana)라는 케냐만의 음료. 망고 맛 음료수인데 최고 인기있는 음료라고 한다. 그 밖에는 soda라 불리는 콜라나 스프라이트, 진저에이드 등이 있다. 모두 코카콜라의 상품이다. 실제로 거리에 나가면 피카나를 비롯한 소다를 파는 상점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짐작컨데, 케냐에서 소비되는 소다의 양은 실로 엄청날 것이란 생각이다.

아직도 궁금한건, 왜 Fish가 안나오고 Chicken이 나오는 것인가이다. 아무튼,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

번잡한 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나 마트를 찾아나섰다.

케냐의 대표적인 대형 마트 NAKUMATT이다. 우리나라의 그것 처럼 정말 다양한 물건을 판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인도인이 사장이라고 한다. 앞서 이야기 한적이 있지만 영국 식민지배 시절,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을 식민지배의 매개로 사용했다고 한다. 흑인들의 문화가 생소하고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오랜시간 익숙해져있던 인도인들을 아프리카에 이주시켜 일종의 중간계급을 만든것이다. 간편하게 말하자면 집주인이 영국인이라면 집사는 인도인 하인은 케냐인정도 라고 생각하면 될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아무튼 이곳에서 특별한(?) 저녁식사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다.

케냐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들렀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여 비상연락처를 확보하고, 우리의 여행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나름 보안이 철저하게 되어있었고, 한국 여권을 보여주자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케냐에서 한국인을 본다는건 실로 반가운일.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외교관에 대한 일종의 동경따위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대사관 방문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외교관에 대한 동경은 곧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도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

집에오는 길에는 미니버스인 마타투(MATATU)를 이용했다. 나이로비 시내에는 우리나라의 버스터미널처럼 이렇게 나이로비 외곽의 다른 도시들로 이동할 수 있는 마타투들이 한 곳에 모여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마타투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퇴근시간이라 하기에는 아직 일러서 마타투가 많이 여유로웠다. 우리는 빈 마타투를 탈 수 있었고, 가격도 생각보다 싸게 이용할 수 있었다. 케냐여행에서 마타투를 이용하려면 출퇴근 시간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가격도 비쌀뿐더러, 사람도 많아서 억지로 밀어넣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여 러시아워를 피하는 것이 좋다.

효원누나와 준기. 남매사이 같다. 여행에서 의지할 사람은 서로 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부쩍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었다.

마타투로 달린지 20여분, 카하와에 도착했다. 구름은 손에 잡힐 듯 하고, 바람은 머리를 식혀주고, 햇빛은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여행을 했다.

사람이 기분좋은 날씨, 살기 좋은 날씨다. 케냐는 천국이다.

저녁에는 깜짝 송년파티가 있었다. 우리를 위해 애써주신 리라 이모에게 음식 대접을 하였다. 볶음밥과 인스턴트 커피를 대접하고, 우리는 깜짝파티를 위해 변신에 들어갔다.

나랑 선미누나가 한복을 입은 것이다. 아직도 케냐인에게 한국 문화는 익숙치 않다. 케냐사람들에게 동양인이란 중국인 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우리가 시내를 돌아다니면, 몇몇 사람들은 쿵후 흉내를 낸다. 그들에게 아시아 사람이란 곧 중국 사람이고, 중국사람이란 곧 쿵후 유단자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쿵후 유단자가 되어 준이를 보호하는 격(?)이 되었다. 이렇게, 한국이 생소한 리라 이모 가족에게 우리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여주고자 한복을 입었다.

생각보다 리라이모는 더 격렬한(?)반응을 보여주셨다. 너무 예쁘다, 멋있다, 좋다, 고맙다 등등. 그 날은 스와힐리어로 다양한 형용사를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우리 사진기 뿐만이 아니라 리라 이모네 가족의 모든 똑딱이 필름 카메라가 동원되어 사진찍기에 바빴다.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우리도 기분이 좋았다.

준이는 잠시 외출, 삼손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리라이모네 부부와 함께.

한복도 입어보고 싶어 하신듯 했다.

사진을 도대체 몇장이나 찍었는지 모르겠다. 여튼 기분은 좋았다.

진짜 부부같기도 하다. 내가 노안이라 그런가

케냐의 시가지에서 우리가 마주쳤던 모습은 영국 식민지배의 잔상이었다. 도로의 모든 모습이, 음식점이, 문화가 모두 영국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괴념치 않아했다. 오히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케냐 사람들은 영국에게 식민지배를 당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이 영국의 식민지였고 그래서 고급 문화를 배웠고, 영어를 쓸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이 식민지배로 잃은 것 보다, 식민 지배 덕분에 얻은 것들 더 자랑스러워했다. 사실 1년 넘게 아프리카어를 배우고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면서, 식민지배가 아프리카에 남긴 잔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무너진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 천의 자연환경등에 대해 나는 항상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들이 풍요로운 땅에서 풍요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기 보다 일종의 죄책감 따위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식민지배를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안타까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외교관을 만난 것이 그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외교관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케냐에서 그들은, 나를 철저히 실망시켰다. 그들과 짧지만 긴 대화를 나누며(나중에 식사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해 케냐에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스와힐리어를 1년동안 배우고, 이곳을 동경해 무작정 짐을 쌌다는 말에 그들은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고시공부나 하라는 조언을 해줬다. 그리고 나이로비에서 많이 떨어진 케냐산 근처까지 갔다는 말에, 겁도 없다며, 케냐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재차 강조를 해줬다. 자국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외교관으로써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조차 이해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느껴져 부끄러웠다. 그들의 좁은 문화적 이해와 옹졸한 태도에, 경외심은  내 마음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여행을 다니며 준이와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준이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에게 다른나라는 다 위험한 곳"이라고. 한국에 처음 와서 차별받고, 소외당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 이야기가 가슴속에 깊게 다가왔다. 케냐는 타지인인 우리에게 한없이 위험한 곳이었지만, 우리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하고 그들의 삶을, 문화를 거스르지 않으려 할 때 그곳은 우리의 또다른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음을 마음에 세겨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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